맑은 여름 하늘 저 쪽에서 시커먼 구름이 몰려온다. 나뭇가지와 잎새들이 수상하게 나부낀다. 천둥소리가 불안하게 가까이 다가온다. 곧 폭풍이 몰아칠 것 같다. 비발디(Vivaldi)의 바이올린 협주곡 ‘사계(四季)’의 2악장 ‘여름’이 품고 있는 두려움이다.
파도 높은 현해탄
2005년 6월 1일. 동해상에서 한ㆍ일 양국의 경비정 13척이 어선 한 척에 서로 밧줄을 걸고 대치했다. 일본 해상보안청 순시선이 한국어선을 어업협정 위반 혐의로 나포하려는 과정에 발생한 사건이다. 필자는 이웃한 두 국가의 주권이 풍랑 거친 동해상에서 대치했다는 사실의 상징성에 주목한다. 서로 명분과 체면을 걸고 힘으로 대응한 이 상황은 앞으로 일어날 수 있는 비슷한 일들의 시작이다. 양국의 해상치안 공권력 대치는 군사력의 대치와 대결을 예고한다. 두 나라는 공들여 쌓아온 우호관계 못지않게 언제든지 위기국면으로 치달을 수 있는 갈등 요인들이 내재하고 있다.
일본인들의 가슴 속에는 한국에 대한 우월감이 자리잡고 있다. 한국은 그들이 지배하던 식민지 ‘조선’이었다. 경제건설을 위해 기술과 자본을 애걸하던 후진국의 모습이 아직도 그들의 기억에 남아있다. 40여 년의 짧은 기간에 이룩한 한국의 비약적인 경제발전은 일본이 지원하고 베푼 기술과 경제원조 때문이라 믿는다. 한일협정을 통해 제공한 독립축하금이 눈부신 경제성장의 종자돈이 되었다는 사실을 즐긴다. 식민통치를 통해 근대화를 이룬 사실은 잊어버리고 그 과정의 잘못만 끊임없이 거론하며 거듭 사과와 보상을 요구하는 한국정부나 국민이 한 없이 불편하다.
한국인의 의식 속에는 아직도 뿌리깊은 반상(班常)의 흔적이 남아있다. 그런 한국인에게 일본은 잘살게 된 상놈(常人)에 다름 아니다. 한때 그들의 식민지 백성으로 살았지만 문화적 사회적 인종적 우월감은 늘 가슴에 품고 지냈다. 일본의 문화라는 것은 모두 우리 조상들이 전해준 것.
전수받은 문화가 어찌 전수해준 문화를 능가하랴. 그들의 의식주와 문화 모두 조롱거리였다. 더구나 일본은 아시아를 벗어나 서양에 속해보려고 탈아입구론(脫亞入歐論)을 부르짖던 근본을 잃어버린 나라, 그런 백성이었다. 남진하는 공산세력에 대항하여 한국이 온몸으로 피 흘려 싸우며 일본의 방패가 되었을 때 그 틈에 어부지리로 경제적 이익만 취했다. 서양에서 좀 더 일찍 배운 기술로 으쓱대며 아시아를 휩쓰는 싸구려 장사꾼에 불과한 그들이다.
일본 그리고 전쟁
그 동안 몇 차례에 걸쳐 일본의 해군 군사력 증강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군사력의 토양은 그 나라 국민이다. 군사력 행사는 종종 국민의 정서와 욕구의 결과이다. ‘전쟁은 정치의 연장’이라고 갈파한 클라우제비츠의 주장이 담고 있는 복합적 의미를 다 살펴보지는 않더라도 적어도 군사대국화를 지향하는 일본정치와 일본국민의 정서와 욕구는 우리의 주목을 끌기에 충분하다.
요즈음 일본의 정치 지도자들은 서슴없이 전쟁이란 말을 입에 담는다.石原愼太郞)동경도지사는 여론조사에 의하면 차기 일본수상으로 가장 유력한 우익 정치인이다. 그는 6월1일자에 보도된 더 타임즈와의 인터뷰에서 중일간 영토분쟁이 일고 있는 센가꾸(尖閣)열도(중국이름 댜오위다오ㆍ釣魚台) 문제를 거론하면서 중국과 제한적 소규모 전쟁도 불사한다는 주장을 폈다. 이 기사를 보고 있자니 일본사람 특유의 강기(剛氣), 오기(傲氣)서린 모습으로 신사참배를 계속하는 일본수상의 모습이 겹쳐 어른거렸다.
일본과 독일이 보여 준 전쟁에 대한 반성이 왜 다른가를 분석한 외국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참으로 일리가 있다고 느꼈다. 그 대강은 다음과 같다.
독일인들은 2차대전을 그들이 저지른 죄(Sin)라고 고백한다. 죄는 아무리 참회를 해도,
그 글은 일본의 문화를 수치(Shame)의 문화로 파악하고 있었다. 일본은 2차대전을 죄로 생각하지 않는다. 지금도 그들은 이름을 달리하여 ‘대동아공영권 건설’을 추진하고 있다. 그들에게 수치스러운 것은 전쟁에서 패배한 것과 천황이 항복했다는 사실이다. 일본 사람들은 수치를 참지 못한다. ‘일 벌레’라고 조롱을 받아가면서 전세계 구석구석을 누벼 세계 제2의 경제대국을 건설했다. 그들은 자기들이 가해자라는 사실은 외면한다. 인류 최초로 경험한 원자폭탄의 피해와 패전의 수치심만 기억한다. 그것이 일본의 문화이고 정서이다. 일본이 걸어갈 그 길이 우리 눈앞에 뚜렷이 보인다.
일본의 국민의식과 민주주의
한국은 일본과는 아주 다른 과정을 겪으면서 민주국가를 건설했다. 시민혁명과 치열한 내부투쟁을 통해 민주정치체제를 수립했고 형식과 절차로서의 민주주의에서 나아가 내용으로서의 민주주의까지 착실히 발전하고 있다. 일본이 후진국으로 간주하는 필리핀과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시아 국가들도 시민혁명을 겪으면서 민주주의 정치제도를 확립하고 있다.
그러?일본은 어떠한가?
2차 대전 패전 이후 점령군 사령관 맥아더 원수의 통치아래 미국이 이식한 민주주의와 그 제도를 고민 없이 받아들였다. 일본국민이 민주적인 절차와 제도를 위해 피 흘리며 투쟁한 경험이 있는가? 그들에게 민주주의는 과연 목숨을 걸고 쟁취하거나 지킬 가치가 있는 이념인가? 더불어 사는 것에 대한 성찰이 없이, 인간에 대한 따뜻한 사랑이 없이 민주주의가 가능한가?
그들은 세계평화에 기여한다면서도 여러 명분으로 군사력 증강에 몰두한다. 경제력에 걸 맞는 국제적 책임을 거론하면서 유엔의 지도국이 되기 위해 돈으로 가난한 나라들의 표를 산다. 그러다가도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는 독기서린 모습으로 상대에게 달려든다. 그만한 국가가 가져야 하는 도덕적, 정치적 사명과 책무를 의식하지 못한다. 일본이 덩치만 클 뿐 미숙아로 보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일본 국민들은 예전처럼 정부가 흔드는 깃발에 따라 천황을 위해 줄줄이 전쟁터로 나갈 것 같다는 생각은 잘못된 판단일까?
아시아 정글 속의 맹수들
아시아 국가들 모두 일본의 무장에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힘을 가진 국가들 대부분이 그렇지만 특히 일본은 힘에 합당한 윤리성을 지니지 않았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런 일본의 군사대국화를 미국은 언제까지 지원할 것인가? 일본을 견제할 수단을 가지고 있는 한, 그리고 일본의 군사대국화가 미국의 이익에 합치되는 한, 힘의 질서가 미국을 중심으로 유지될 수 있는 한 그럴 것이다. 미국에게는 아시아의 동맹국 일본은 유럽에서의 동맹국 영국과 여러모로 다르다. 미국이 내심 가지고 있는 복잡한 이중적 심정을 이해하면 아시아 미래의 한 면이 눈에 보인다.
최근의 국제 군사문제회의에서 미국측 발표자의 발언이 아직도 귓가에 맴돈다. ‘이제 미국에게 누가(Who) 적인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어떻게(How) 미국의 안보가 위협받을 것인가 하는 점이 가장 큰 관심이다.’ 미국 안보에 위협을 가할 수단을 가진 모두를 잠재적인 적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국제사회에서는 끊임 없이 주위를 경계하며 살아가는 밀림 속 맹수의 생리를 터득해야 생존이 가능하다. 더욱이 중국이라는 거대한 세력이 어느새 또 하나의 강자로 등장하고 있다. 밀림에서는 한동안 평화가 유지되다가도 내 영역이 위협 받으면 가차 없이 물고 덤비는 싸움이 시작된다.
앞으로 중국과 러시아의 해군력을 비롯해 우리나라의 안보선(安保線)을 위협할 가능성이 있는 국가들에 대해 살펴보겠지만 주변국의 군사력 증강 움직임을 바라보는 마음은 초조하고 바쁘다. 한국 어선 신풍호를 나포하겠다고 밧줄을 걸며 달려드는 일본 순시선을 보면서 비발디의 ‘여름’ 천둥소리가 품고 있는 불길한 소식을 예감한다.
윤석철객원기자 ysc@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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