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일 오후 2시 서울고법 404호 법정. 2002년 대선을 앞두고 한화 김승연 회장 등으로부터 불법자금을 받은 혐의로 기소돼 1심서 집행유예로 풀려난 서청원 전 한나라당 대표에 대한 항소심 공판이 열릴 예정이었다.
지난해 9월 서씨의 항소장이 접수된 이후 단 2차례 재판이 열린 뒤 그 동안 4차례나 연기돼 6개월 만에 열리는 재판이었다. 하지만 이날 재판도 채 5분이 안 돼 끝났다. 증인으로 채택된 김 회장이 또 출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김 회장의 불출석은 이번이 4번째다. 그 때마다 해외출장 등 바쁜 일정과 형사소송법상 ‘증언거부권’을 이유로 내세웠다. 증언거부권은 증인이 그 증언으로 인해 불이익을 당하지 않도록 하려는 취지에서 도입된 것이다. 때문에 이미 불법자금 제공 사실을 자신의 재판에서 시인해 유죄가 확정된 김 회장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는 것이 재판부의 판단이다.
하지만 담당 재판부인 서울고법 형사5부(이홍권 부장판사)는 이날도 김 회장에 대한 과태료 부과나 구인장 발부 등 불출석에 따른 어떠한 조치도 없이 재판을 다음달 12일로 또 연기했다.
2002년 3월 부산시의원 후보로부터 2,000만원을 받은 혐의 등으로 지난해 5월 기소된 한나라당 엄호성 의원의 경우도 비슷하다. 기소된 지 1년이 넘었지만 엄 의원의 의정일정 등을 이유로 수 차례 기일이 변경돼 아직까지 1심이 진행중이다.
지난 대선 당시 썬앤문그룹에서 불법자금 1,000만원을 받은 혐의로 불구속 기소된 한나라당 황우여 의원과, 한나라당으로 당적을 옮기면서 불법자금을 받은 입당파 의원 7명에 대한 재판도 1년이 넘도록 한 건도 1심조차 마무리되지 않았다.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로 지난해 6월 기소된 한화갑 민주당 대표도 1심이 선고되기까지 1년 가까이 걸렸다.
선거법 위반 사건도 크게 다르지 않다. 열린우리당 강길부, 한나라당 김재경 의원은 지난해 총선이 끝난 지 1년여가 지나서야 1심이 선고됐다. 선거참모나 가족이 선거법 위반으로 기소된 경우는 아직도 1심 재판이 진행중인 사건이 적지 않다.
법원은 선거사범을 비롯한 부패 정치인에 대해 ‘신속한 재판’ 의지를 천명한 바 있지만 이미 빛이 바랬다. 이들 정치인은 당선 무효형을 선고 받더라도 항소심을 거쳐 대법원 확정 판결을 받기까지 앞으로 상당기간 의원직을 유지할 수 있다.
법원은 일반 피고인의 경우 불구속 재판이라 하더라도 통상 2주 내에 다음 재판을 열지만, 불구속 정치인에게는 다음 재판까지 1~3개월의 여유를 준다. ‘소송촉진 등에 관한 특례법’은 재판기간을 1심 6개월, 항소심 4개월로 정해놓고 있으나 사문화한 지 오래다.
법원 관계자는 “불구속 정치인이나 기업인은 여론의 관심에서 벗어나기 위해 일부러 재판을 지연시키는 경우가 적지 않다”면서도 “재판절차상 피고인측의 요청을 묵살하기가 쉽지 않다”고 말했다.
서울 서초동의 한 변호사는 “정치인, 기업인도 기소되거나 증인으로 채택된 이상 다른 피고인이나 증인과 절차상 동일하게 처리해야 한다”며 “선고 결과에 대해서도 의심을 받는 판에 재판 진행마저 차별한다면 사법부에 대한 불신은 더욱 커질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김지성기자 js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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