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인들은 타고 난 음모가라거나, 더 나쁘게 말해 아예 사기꾼이나 도둑놈이라는 게 통념인 듯 하다. 하지만 독일 연방하원의원인 헤르만 셰어는 생각이 다르다. “정치가 정치인을 망가뜨리는 것이다.”
경제학자이고 사회학자이면서 세계재생에너지위원회 의장을 맡아 환경보존운동에서 세계적으로 명망있는 셰어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정치인들은 왜 만날 욕만 얻어 먹는지, 정치제도에 잘못은 없는지를 풍부한 사례와 날렵한 글솜씨로 조명하고 있다.
책의 제목이 ‘정치인을 위한 변명’인 것은 정치인인 저자가 정치인에게 큰 잘못이 없다는 말을 하는 것이라고 원제인 ‘정치인들(Die Politiker)’을 우리말 번역본에서 바꿔 붙인 것일 뿐이지, 이 책이 정말 무슨 변명처럼 정치인을 미화한 것은 결코 아니다.
셰어에 따르면 현실을 보면 정당은 한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일치에 대한 강박으로 정치인 개개인의 의사를 억압한다. 의회 구조는 정치인에게 줄서기를 강요한다. 언론은 음모나 기회주의, 적대감 등이 정치계에만 있는 양 비난하고, 정치인을 무차별로 일반화한다.
국민은 신뢰하지 않는 당과 정치인을 계속 뽑아주면서 그들이 바뀌지 않는다고 비난한다. 각종 국제협약은 각국 정치인들의 개별적 이견들이 힘을 가질 수 없도록 강제한다.
이런 현실을 짚어 나가면서 자자는 온갖 정치 문제의 중심에는 정치인이 있는 것이 아니라 정치 시스템이 자리잡고 있다고 주장한다. 소련은 민주적 요소가 없었기 때문에 망하고 말았다.
오늘날 대다수 자본주의 국가도 마찬가지다. 여기에 NATO, WTO, EU 등이 각국의 헌법과 민주주의를 넘어서는 권한을 지님으로써 정당과 의회는 자국의 이익을 위한 결정을 내릴 수도 없는 세상이 되어버렸다. 상황이 이런데 왜 정치인에게만 책임을 묻는가고 그는 되묻는다.
대안은 민주주의 헌법 체제가 몰락하기 전에 복잡한 정치 구조망을 없애는 개혁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의회민주주의와 분권민주주의를 확립하고, 민주주의 헌법이 정치적 원칙으로 자리잡도록 해야 한다.
밖으로는 국가 차원의 권한을 새롭게 확정하고 각국이 자기 보존을 위한 민주주의적 자기결정권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저자는 ‘글로벌 통치’가 민주주의와 양립할 수 없으며 개별 국가의 사회적, 경제적, 환경적, 정치적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본다.
정치인의 반성을 촉구하는 대목도 있다. 정치인은 권력가, 정열가, 사회활동가, 나르시시스트, 이익대표자의 5가지 유형으로 분류하는 저자는 ‘최소한 정치적 이상에 대한 열정을 잃었다면 더 이상 정치를 하지 말라’고 주문한다.
그의 주장에 모두 동의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어쨌든 정치인이 정치에 관해 이런 알찬 책을 쓸 수 있는 독일이 갑자기 부럽다.
김범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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