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옥의 밀실 공포를 표현하는 데 아기 옷에 쓰는 부드럽고 밝은 청색을 칠할 수 있겠소? 당연히 어둡고 드라마틱한 색깔이 나오지. 황토와 자홍색 물감을 뿌렸어요. 고문은 야만의 상징입니다. 우리 시대에 있을 수 없는 얘기지. 중세에나 있을 일입니다. 21세기의 미국이라는 문명국가에는 더더구나 어울리지 않지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소이다.”
현존하는 남미 작가로는 세계 최고로 꼽히는 콜롬비아 화가 페르난도 보테로(73)씨가 7일 분노를 터뜨렸다. 이탈리아 로마의 팔라조 베네치아 박물관에서 미군의 이라크 포로 학대를 고발하는 작품 전시회(16일~9월 25일)를 갖기에 앞서 피에트라 산타의 아틀리에에서 로이터 통신 기자와 한 인터뷰에서였다.
전시회에 나올 그림들은 밧줄에 묶여 폭행당하고, 이빨을 드러낸 군견 앞에서 공포에 질린 포로들의 모습을 담았다. 발가벗겨진 채 쓰레기 더미처럼 쌓인 죄수들, 피로 얼룩진 곤봉으로 반라의 포로 머리를 내리치는 미군, 여자 속옷 차림으로 성희롱을 당하는 남자들…. 보테로 화백 특유의 과장되게 뚱뚱한 인물들은 행복함을 느끼게 하던 예전 작품들과는 정반대로 혐오스러움을 극단적으로 강조한다.
하얀 콧수염이 인상적인 이 노 화백이 이런 그림을 그리게 된 것은 지난해 비행기를 타고 가다가 신문에서 바그다드 주둔 미군이 이라크인 포로를 고문ㆍ학대한 아부 그라이브 교도소 사건을 접하고서였다. 그는 6일 멕시코 FIA 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순간 분노가 솟구쳤습니다. 스튜어디스한테 당장 아무 종이나 갖다 달라고 했지요. 거침없이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이번 시리즈가 나오는 순간이었지요”라고 밝혔다. 이렇게 해서 작년 10월부터 불과 몇 달 만에 그림 20점과 조각 등 모두 80점을 완성했다.
보테로 화백은 이렇게 말을 이었다. “처음에는 가슴 속에서 참담함을 떨쳐버리기 바빴지만 예술을 통해 이 분노를 반드시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했소이다. 언론에서 아부 그라이브에 관한 보도가 멈추는 순간 사람들은 미군의 잔혹함에 관한 대화를 중단하게 되겠지요. 내 작품은 그 무지막지한 폭력과 범죄에 대해 영원한 증인으로 남을 것이외다.”
세계가 이번 전시회에 주목하는 이유는 1937년 스페인의 작은 마을 게르니카를 독일 공군이 무차별 폭격한 사건을 고발한 피카소의 걸작 ‘게르니카’를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로마 전시가 끝나면 10월에는 독일 슈투트가르트에서, 이후 아테네에서 전시를 계속한다. 그러나 정작 미국에서는 전시회를 할 수 있을지 미지수다.
그는 마약 밀매로 유명한 콜롬비아 메데인에서 행상을 하는 아버지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투우사 학교를 나와 16세 때 메데인 미술연구소가 주최한 그룹전에 수채화 두 점을 출품한 것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그림을 시작했다. 이후 이탈리아 산마르코 아카데미와 보고타 국립미술대학에서 공부했다. 1976년 파리 비엔날레에서 주목받기 시작했고 96년에는 한국에서도 전시회를 한 바 있다.
“가장 콜롬비아적인 화가”로 꼽히는 보테로 화백은 “이번 작품들은 역사의 기억을 간직할 용의가 있는 공공 미술관에 기증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박석원 기자 spar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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