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청에 길게 드리웠던 그림자도 어둠에 묻혀 버렸다. 순결한 듯 하얀 창호지를 바른 미닫이 문틈으로 밤의 소리가 찾아 왔다. 산자락에서 건너 온 소쩍새의 청명한 울림, 방금 모내기한 연두빛 무논에서의 개구리 합창. 파르르 떨리는 창호지에 여과된 그 소리에 정신이 말갛게 깨어난다.
조용한 밤의 멜로디를 깨우는 건 이따금씩 풍뎅이 따위 풀벌레가 환한 창호지문에 부딪어 내는 내는 ‘탁, 탁’ 소리 뿐이다. 먼 기억 속으로의 여행에 들뜬 채 고택(古宅)에서의 하룻밤은 그렇게 깊어갔다.
경북에서도 산골 중 산골로 꼽히는 봉화. 꼿꼿한 양반네들이 오롯이 유교 문화를 지 켜온, 여전히 살아있는 민속촌이다. 춘양면의 만산 고택은 봉화에 남아있는 여러 고택들 중의 하나다.
대한제국의 통정대부 중추원 의관을 역임한 만산(晩山) 강용(姜鎔ㆍ1846~1934) 선생이 지은 가옥이다. 만산은 일제에 의해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벼슬을 버리고 이곳에 내려와 국운의 회복을 기원하며 지냈던 사람이다.
문수산과 낙동강의 첫번째 지류인 운곡천을 배산임수 삼아 들어선 고택은 정면 11칸의 긴 행랑채 가운데의 솟을대문이 유독 청아하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넓은 마당 건너편에 ‘’자형으로 안채와 사랑채가 이어져 있고 왼편엔 공부방인 2칸짜리 소박한 서실이 있다. 오른편으로는 따로 담을 두르고 문을 낸 별당 ‘칠류헌(七柳軒)’이 고풍스럽게 서 있다.
이끼 낀 기와는 130여년 세월의 무게를 고스란히 담아냈고, 담벼락을 따라 만들어진 소박한 화단은 안주인을 닮은 듯 수줍게 꽃을 피우고 있다.
만산의 4대손인 강백기(60) 선생 내외가 노모를 모시고 지키고 있는 이 고택은 봉화 춘양목으로 지은 건축미 덕택에 건축 전문가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던 곳이다. 주인은 그러다 작년부터 집을 일반에 개방했다.
별당인 칠류헌 마당에 수세식 화장실과 샤워장을 만들어 놓고 손님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봉화에서는 최초의 고택 체험 장소인 이 곳은 일반인에게 고택 체험이 가능한 유일의 장소이기도 하다.
칠류헌은 만산 고택의 꽃이라 할 수 있는 곳. 창호문을 처마에 걸어 올리면 너른 대청이 시원하게 열린다. 정성스레 손때 배인 나무판이 규칙적으로 조합된 마룻 바닥은 100여년 세월에도 뒤틀림이 없다. 춘양목의 진가는 그렇게 유감없이 드러난다. 3개의 방과 대청까지, 족히 50명이 함께 머물 수 있는 공간이다.
일반에 개방됐다고는 하나 만산 고택에는 그 흔한 홈페이지도 없다. 드러내놓고 홍보하지 않으니 손님들도 알음알음 찾아올 뿐. 주인은 “손님을 맞는 일이야 언제나 정성을 다 해야 하지만 괜히 장삿속으로 비쳐질까 걱정도 되지만, 실은 너무 많이 몰려들면 뒷감당할 자신도 없어서”라고 한다.
서울에서 직장 다니고, 공부하는 3명의 자녀들도 맞장구친다. 종부인 어머니가 숙박집 아줌마로 전락될까 걱정된다며 못마땅해 했다는 것.
“새로 수세식 화장실을 갖췄다고 해도 고택이다 보니 편치 않습니다. 옛집이 좋아 찾는 이들이라면 불편해도 불편하단 소리를 하지 않는데, 그렇지 않다면 불만이 많으실 겁니다.” 안주인의 걱정이다.
그러나 박학다식한 주인으로부터 듣는 역사 공부와 안주인이 내놓는 맛깔스런 밥상은 분명 고택 체험에서 얻는 큰 즐거움이다. “그저 우리네 먹는 반찬이라 보잘 것 없다”고 말하는데 찬 하나 하나가 예사롭지 않다. 이른 봄 얼음을 밀치고 돋는 산갓으로 만든 붉은 빛의 시원한 산갓챗물은 톡 쏘는 향과 맛으로 식욕을 돋운다.
참기름과 간장을 발라 곱게 펴서 포개 놓은 참취(서울에선 곰취라 부른다)와 고소한 참나물은 주인 내외가 직접 태백산 자락 1,000m 이상 고지에서 캐낸 산나물이다. 숲을 그대로 품은 듯 향이 깊다. 또 조청과 고추장 등으로 버무린 산더덕무침과 당귀달래무침은 한 번 먹어본 이들이라면 결코 잊을 수 없는 절묘한 맛을 선사한다.
하루 숙박에 5인 기준 5만원, 10명은 10만원. 그 이상은 1인 당 5,000원씩 추가된다. 식사는 5,000원. 만산고택 (054)672-3206, 봉화군청 문화체육관광과 (054)679-6394
춘양(봉화)=글ㆍ사진 이성원기자 sungwon@hk.co.kr
■ 어떤 곳
만산고택이 위치한 춘양은 소나무 중 최고로 꼽는 금강송의 집산지였다. 금강송이 ‘춘양목’으로 불리는 이유다. 기차도 제대로 들르지 않던 춘양에 영주와 철암을 잇는 영암선 철로가 지나치도록 노선을 억지로 돌려 놓았다는 곳이다. 저 유명한 ‘억지춘양’이란 말이 그래서 나왔다.
춘양은 태백과 소백의 사이, 양백지간에 사방이 1,000m 이상의 높은 산으로 둘러싸인 산골로 김기덕 영화감독과 이창동 전 문화부장관의 고향이기도 하다. ‘정감록’에서 기록된 바, 전란을 피할 수 있다는 십승지 중 하나다. 춘양면 석현리 각화산 중턱에 위치한 태백산 사고지는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해 왔던 전국의 5대 사고지 중 한곳이다.
오대산, 전주, 강화 정족산, 무주 적상산 등지의 사고가 임진, 병자 양란때 모두 소실된 데 반해 태백 사고에 있던 실록은 일제때 일본군에 의해 사고가 소실되기 직전 규장각으로 옮겨져 지금의 소중한 역사 자료로 남아있다. 임진왜란 당시 서애 유성룡이 선조를 모시고 의주로 몽진했을 때 서애의 큰 형님이 서울의 부모를 모시고 거꾸로 남으로 피란 와 거처했던 곳도 봉화 춘양이다.
봉화는 관직을 버리고 초야로 찾아 든 양반이 많았던 만큼 정자의 수가 수십 개에 달한다. 춘양면 학산리의 ‘와선정(臥仙亭)’은 그 중 독특한 곳으로 병자호란 이후 벼슬을 버리고 이 곳에 은거하며 대명절의(大明節義)를 지키겠다고 모인 5명의 선비가 지은 정자다.
운곡천과 금강송이 어우러진 풍경이 멋스럽다. 400여년 가까이 지난 지금까지도 매년 중복날이면 그 후손들이 모여 우애를 다지며 선현의 뜻을 좇고 있다.
애당2리의 참새골, 석문동 계곡은 여름철 최고의 피서지다. 계곡을 타고 내려오는 바람은 시원하다 못해 싸늘하고 그 물의 차가움이란 전국에 견줄 곳이 없다고 한다. 날이 더워질수록 그 냉기가 더하다는 계곡. 그래서 한 여름에도 긴 팔 옷을 준비해야 하고 야영이라도 할 참이면 두꺼운 이불이 필요한 곳이다.
계곡을 타고 오르면 태백산으로 이어진다. 산행길은 대부분 암벽이 아닌 부드러운 흙길로 무릎, 발목에 부담이 덜하다. 순백의 산목련이 아직도 꽃을 피우고 있고 지난 밤 내린 비에 우수수 떨어진 찔레꽃이 그 길을 수 놓고 있다.
문수산 자락 북쪽의 서벽은 한때 스키장 조성이 추진됐던 깊은 산골. 금강송의 거대한 군락이 남아 있어 ‘천상의 삼림욕’을 즐길 수 있다. 바로 아래에는 혀끝을 알싸하게 만들며 툭 쏘는 약수, ‘두내약수탕’이 있다.
춘양(봉화)=이성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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