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적십자사는 지난해 8월 외국계 업체 S, E, G사 등 3곳과 헌혈장비 납품계약을 체결하면서 ‘입찰 및 납품 시 업체와 직원 간의 담합이나 직원에 대한 향응과 접대 등이 발각되면 계약을 해지하든지 추후 관련 사업에 재입찰을 금지한다’는 내용의 청렴계약서를 작성했다.
청렴계약은 대외적으로 해당 기관이 청렴하다는 것을 알리고 내부적으로는 직원들의 부조리를 미연에 방지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하지만 지난달 27일 시민단체 공익제보자모임이 이 계약에 대해 “경쟁입찰을 해야 하는 한적 규정을 어기고 수의계약을 했다”며 공정거래위원회에 고발하면서 지난 4년간 한적 직원들이 이 업체들로부터 여행경비 등의 명목으로 19억원을 받은 사실이 드러났다. 그런데도 계약은 여전히 해지되지 않았으며 관련자 문책도 없었다.
2000년 서울시가 도입하면서 정부 산하 행정기관과 지방자치단체, 공사 등이 앞 다퉈 도입한 청렴계약제가 유명무실해지고 있다. 도입초기만 해도 기관들은 경쟁이나 하듯 공사 수주나 납품 계약 때마다 제도 시행을 떠들썩하게 발표해 왔지만 실시 4~5년만에 형식적인 첨부문서 수준으로 전락했다.
청렴계약제란 범세계적 비정부기구(NGO)인 국제투명성기구가 1990년대 제안한 것으로 특정 액수 이상의 공공 건설공사 및 물품구매 입찰이나 계약을 체결할 때 참가 업체와 행정기관이 뇌물을 주고 받지 않고 이를 위반할 때에는 서로 제재를 받겠다고 약속하는 제도다. 서울시가 고건 시장 재임 시 처음 도입했으며, 현재는 조달청 건설교통부 경찰서 등 행정기관과 한국전력공사 한국수력원자력 등 40~50개의 공공기관에서 시행하고 있다. 또 경남도 대전시 전주시 등 10개 지자체에서 시범 실시 중이다.
청렴계약이 잘 이행되고 있는지 감시하는 시스템이 전무한 것이 제도부실화의 가장 큰 원인으로 꼽힌다. 서울시의 경우 도입 당시에는 참여연대 등 시민단체가 추천한 5명이, 현재는 국제투명성기구 한국본부가 추천한 3명이 청렴계약 전담 감시위원으로 활동해 왔으나 이들이 서울시와 업체의 모든 공사관련 계약을 확인하고 감시하기란 불가능하다.
또 계약 위반 시 관련자를 제재할 수 있는 강제력이 없는 것도 문제다. 청렴계약서를 보면 ▦문제발생 시 처벌 받을 수 있다 ▦어떤 제재도 감수하겠다 ▦관련 직원을 처벌할 수 있다는 식으로 애매하게 규정돼 있어 문제가 발생하더라도 피해나갈 여지가 있다. 이 때문에 수년간 40~50개 기구에서 청렴계약제를 시행해 왔지만 부패방지위원회에 위반 및 제재 사례가 보고된 적은 단 한번도 없다.
참여연대 최한수 팀장은 “청렴계약의 이행에 대한 감시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전시행정으로 전락하고 있다”며 “시민단체 참여를 적극 유도해 전문성과 객관성을 확보하고 정부 차원에서 관련 예산도 확충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부방위는 청렴계약제의 파행 운영과 관련, 계약제 위반 시 공무원이 손해배상하는 등의 강제조항을 추가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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