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의 끝은 적막했다. 어디에도 희망은 없었다. 서로 갈려 미래요, 희망이라고 부르짖던 불꽃들이 모든 것을 태우고 맥없이 꺼져버린 뒤였다. 남은 이들은, 거덜난 살림 앞에 이산(離散)한 이들의 막막한 안부에 무엇보다 당장의 주림에 유령처럼, 주저앉듯 허청거렸다. 그 적막은 절망이었다. 하지만 삶 바깥의 세상은 요동치고 있었다. 새로운 구호들로, 새로운 스크럼을 위한 이합집산으로 하루가 어지러웠다. 혼란이었고, 혼돈이었다.
그 해 1954년 6월9일, 한국일보는 창간했다. 창간사설은 “신문은 누구도 이용할 수 없고, 누구도 억제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척사(斥邪)의 주문이자, 존재의 선언이었다. 절망한 가슴에 희망을 틔우고 온갖 헛것 가운데에서 참된 육성을 찾겠다는 절박한 외침이었다.
희망의 노래이고자 했던 신생 신문의 선택은 문학이었다. 창간 연재소설 염상섭(廉想涉)의 ‘미망인(未亡人)’은 30살 안팎의 전몰 미망인과 납북인사의 삶을 통해 당시의 고단한 사회상과 미래에 대한 희망을 전했다. “과부의 설움이 아니다. 전란을 겪고 쓰라린 생활고와 싸우며 씩씩하게 살아가는 그 참답고 아리땁고 웅건한 모습을 엿보자는 것이다. 깨어진 벽돌 조각 밑에서 돋아나는 새 움이 옆구리로 비틀어져 나오다가, 그 생래의 정기를 받아 어떻게 꼿꼿이 뻗어 나가서 이 나라의 부흥과 이 자손이 번영에 빛이 되는가를 바라보련다.”(작가의 변)
그 선택은 본보(本報) 반 백년의 고집으로 낭창낭창 이어졌고, 구비마다 빛나는 결실로 한국 문학을 살찌워왔다. 창간 5년 뒤인 59년 7월12일, 본보 1면에는 조병화 시인의 시 ‘여름’이 실렸다. ‘일요시단(日曜詩壇)’의 시작이었다. ‘시단’은 70년 12월까지 무려 412주를 뻗어가서는, ‘일일시단’으로 바뀌었고, ‘신춘(新春)시단’ ‘조춘(早春)시단’ ‘성하(盛夏)시단’ ‘가을시단’ ‘송년(送年)시단’ 등으로 문패를 바꿔가며 이어졌다. 시단은 짧지만 밝은 한 줌 햇살 같은 시편들로 채워졌다. 어두운 뉴스를 전함에, 독자들에 대한 그 송구함을 시로써 덜고자 함이었다. 소설가 김동리(金東里)는 본보 지령 1만호를 축하하는 81년의 글에서 “그 숱한 신문과 지면들 가운데 반드시 본문까지 챙겨 읽는 것은 한국일보 첫 면의 시”라고 고백하기도 했다.
웃지 못할 사연도 적지 않았다. 소설가 정비석(鄭飛石)은 4.19혁명 직후인 60년 5월12일 소설 ‘혁명전야’ 연재의 변을 실었다. “이 날이 오기까지 우리들의 생활은 얼마나 암담하고 처참했던 것인가. 나는 이제 ‘革命前夜’라는 제호로 어둡고 괴로웠던 그 시절의 사회상을 한 편의 소설로 그려볼까 한다.… 독자제현의 편달을 바라마지 않는다.” 서울대생과 연ㆍ고대생 세 인물을 화자로 당시 대학생들의 고뇌를 그리고자 했던 이 소설은 하지만, 연재 사흘 만에 독자의 거센 ‘편달(鞭撻)’로 중단된다. 문제가 된 한 대목이다. “돈 오십환이 생기면 고려대생은 막걸리를 마시고, 연세대생은 구두를 닦고, 서울대생은 노트를 산다는 것이다. 따라서 여대생들로 보면 연세대생은 연애 대상이요, 고려대생은 결혼 대상이요, 서울대생은 동경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반면 황석영(黃晳暎)의 ‘장길산’은 74년 7월11일부터 84년 7월5일까지 장장 10년간 2,092회를 연재, 한국 신문 소설 사상 최장 연재의 기록을 낳기도 했다. 군주나 반가의 영웅이 아닌, 천출 광대 영웅의 탄생은 유신- 신군부 독재로 이어진 당대 질곡의 역사에 한 줄기 푸른 바람이었고, 80년대 지식인 ‘민중 담론’의 키워드로 자리했다. ‘장길산’으로 하여 한국 문단의 우람한 기둥으로 선, 당시 32세의 이 무명 작가는 연재를 끝낸 다음 날 기고에 “어떤 때에는 신문사의 마감시간과 그와 똑같이 긴요한 현실에서의 내 몫이라는 겹장을 받고 쫓기며 소설을 쓰지 못했던 때도 많았다”고 적었다. 수 없이 거듭됐던 ‘장길산, 작가 사정으로 쉽니다’의 사고(社告) 뒤에 가려진 쌍방의 그 피 말리던 고통을 두고 그는 “참으로 ‘장길산’은 한국일보의 전폭적인 지지의 토대 위에서 대미를 장식했다”고 적었다.
해해년년, 귀한 글로 신문을 빛내준 문학인과 문학에 대한 신문의 보답은 늘 부족했다. 창간 이듬해부터 문을 연 신춘문예, 육당(六堂)의 ‘해에게서 소년에게’ 발표 60주년이던 69년 서울 남산 자락에 세운 ‘소월시비’, 그 해 제정한 ‘한국창작문학상’(현 한국일보문학상), ‘김훈ㆍ박래부의 문학기행’과 뒤이은 유사한 문학 기획, 90년 제정한 ‘팔봉비평문학상’, 창간 40주년이던 94년 문단 인사 500여 명을 초청해 벌인 2박3일간의 ‘한국문학인대회’ 등이 고작이었다. 다만, 본보의 신춘문예가 시작 이래 단 한 번의 끊김 없이 이어져 지금 한국 문단의 가장 맑고 힘찬 물길을 이루고 있으며, 한국일보문학상이 자타공인 가장 순정(純正)한 문학상으로, 문인들이 가장 탐내는 상이 됐음은 감히 자부한다. 지난 날, 털털거리?관광버스에 막걸리 싣고 ‘두어 날 기자들과 바람이나 쐬시라’며 이따금 벌였던 ‘관동유람’으로도 문인들은 흔연히 취해주었다.
본보 51년의 맥은, 그들에 기대어 51년의 독자들과 더불어 희망 속에 행복하게 성장했으며 영구히 이어갈 것임을 엄숙히 밝힌다. 본보 창간일의 두 숫자, 6과 9는 포개어 태극이며 칠전팔기(七轉八起)의 정신을 상징하며, 상징색 초록은 늘 푸른 솔잎의 그 빛을 담고 있다.
최윤필 기자 walde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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