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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공부를 하는가] (13) 고전평론가 고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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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공부를 하는가] (13) 고전평론가 고미숙

입력
2005.06.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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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4학년 시절, 당시 명성을 날리던 한 평론가의 강의를 들었다. 세련된 이론과 쌈박한 해설을 예상했건만, 희한하게도 그 강의는 ‘고전소설강독’이었고, 제목에 걸맞게 강의방식도 평범하기 그지 없었다. 춘향전, 홍길동전, 호질, 허생전 등을 ‘소리내어’ 읽은 다음, 한 작품이 끝날 때마다 독후감을 제출하는 식이었다. 수업을 따라가기 위해 교재를 들고 다니면서 틈나는 대로 끊어 읽기 연습을 하곤 했는데, 눈이 아니라 소리를 통해 공부를 할 때의 느낌이 참, 기묘했다. 그리고 끙끙대며 써낸 독후감은 매번 맞춤법에서 시각, 논리적 구성 등에 대한 세밀한 논평과 함께 되돌아왔다.

리포트를 돌려받을 때마다, 나는 긴장과 감동으로 가슴이 ‘떨렸다’. 아마도 내 하찮은 사고의 파편들이 세심하고도 치밀한 지적 배려를 받는 데서 오는 자긍심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 수업을 통해 나는 그간의 수업들, 운동권 서클에서 한 의식화공부, 그 모든 것을 합친 것보다 더 강렬한 지적 촉발을 받았다. 그 촉발에 부응하여 나는 가차없이(!) 인생행로를 바꾸었다. ‘안개 속의 풍경’처럼 모호하기 그지 없었던 서양문학의 장을 떠나 한국고전문학이라는, 낯설고 이질적인 매트릭스 안으로 들어간 것이다. 돌이켜보건대, 그것은 내 공부의 여정에서 가장 큰 변곡선이었다.

대학원 석사과정은 ‘지옥에서 보낸 한 철’이었다. 그 시절 내가 속한 대학원은 정체불명의 격정과 혼돈이 들끓던 용광로였다. 이미 일가(一家)를 이룬 스승들과 나처럼 그 스승들로 인해 삶의 경로를 바꾼 ‘강호의 고수’들이 한 치의 양보도 없이 각축하는, 일종의 ‘무림(武林)’이었다. 사서삼경도 떼지 않고 겁도 없이 이 무림에 발을 들여놓은 나는 선배들의 표현에 따르면, 구제불능의 ‘하룻강아지’였다. 수업 중에 발표한 발제문은 언제나 박살이 났고, 격렬한 논쟁에 단 한번도 말을 섞어보지 못한, 처참한 순간들이 이어졌다.

석사논문 초고를 완성하자, 먼저 선배들이 돌아가면서 ‘손을 봐’주기 시작했다. 또 당시 지도교수님은 미국에 계셨는데, 간신히 고쳐서 보내면, 논문은 시뻘건 ‘피바다’가 되어 태평양을 건너왔다. 한 편의 글, 아니 단 하나의 문장을 완성하기 위해선 ‘검을 벼리고 악기의 현을 고르는’ 것처럼 처절한 수련이 필요하다는 걸, 그리고 그것은 신체와 감성의 변화를 수반한다는 걸 그때 알았다. 오직 뚝심과 오기만으로 버텨냈지만, 그 시절 나는 진정, 행복했다. 앎에 대한 열정과 스승과 동학들 사이의 굳건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내 공부법의 ‘하부구조’에는 그때 새겨진 기억들로 충만하다.

박사과정 시절 고전문학 연구에 익숙해지려는 즈음, 선배들의 유혹에 이끌려 늦깎이로 마르크스/엥겔스라는 새로운 스승들을 만났다. ‘공산당선언’ ‘프랑스 혁명사 3부작’ ‘자본’ 등을 읽으면서 ‘경이에 찬 불면의 밤’들을 보냈다. 조선후기를 통해 역사의 진경을 탐색하던 나의 공부는 이제 혁명이라는 화두로 옮겨갔다. 대열의 꽁무니를 간신히 따라갈 뿐이었지만, ‘거리의 열정’을 맛보기도 했다. 무엇보다 나를 ‘잠 못 이루게’ 한 건 그들의 문체였다.

고도의 난해한 이론과 경제학적 분석이 그토록 눈부신 수사학을 동반할 수 있다니. 적을 공격할 때는 폐부를 찌르듯 예리하고, 프롤레타리아의 현실을 폭로할 땐 눈물겹게 애절했으며, 혁명의 파토스를 고양시킬 땐 말할 수 없이 힘찼다. 말하자면, 마르크스/엥겔스가 내가 가르쳐준 것은 ‘지식의 외부’였다. 지식이 대학을 박차고 거리로 나아가면 세상을 변혁할 수 있다는 것, 또 글쓰기가 아카데미의 경직된 성채를 박차고 나오면 낯설고 역동적인 경계를 획득한다는 것을 실감한 것이다. 내 박사논문에는 어설프나마 이 새로운 스승들의 가르침을 체현하고자 하는 간절한 열망이 담겨있다.

하지만, 박사논문을 쓰고 ‘세상 속으로’ 나왔을 때는 이미 90년대 중반이었다. 소비에트는 붕괴된 지 오래고, 혁명에 대한 비전은 사라져 버렸으며, 설상가상으로 제도권 진출은 요원하기만 했다. 한마디로 내 공부를 떠받치고 있던 모든 가치들이 지상에서 홀연 증발해버린 셈이다. 황량한 가슴, 달랠 길이 없었다. 알 수 없는 어떤 목소리들이 나에게 ‘모든 것을 놓아버리라’고, ‘이제 너 자신으로부터 떠나라’고 명령하는 것같았다. ‘피할 수 없다면 정면으로 통과한다’는 소신에 따라, 초발심으로 돌아가 다시 시작했다.

그때 나를 사로잡은 물음들은 아주 소박한 것이었다. 어째서 혁명의 열정은 바리케이드 위에서만 들끓는 것일까? 바리케이드가 걷히면 왜 모두들 다시금 중산층의 무기력한 일상 으로 되돌아가는 것일까? 80년대를 주름잡던 ‘진보적 학자’들이 상당수 제도권에 진출했는데, 그럼에도 왜 ‘인문학의 위기’라는 유령이 끊임없이 대학 주변을 배회하는 것일까? 이 물음들이 ‘근대적 주체생산’이라는 문제틀 안에 있다는 것을 니체와 푸코, 들뢰즈/가따리를 만나면서 알게 되었다.

프랑스 68혁명 이후 근대성의 인식론적 기저를 고고학적으로 탐사하면서 탈근대적 사유를 극한까지 밀고간 이들의 사유는 다시금 나의 지적 열정에 불을 지폈다. 그리고 그들의 난해하면서도 까다로운 세계를 친절하게 안내해준 서울사회과학연구소의 ‘좋은 친구들’과의 접속이 이루어졌다. 수유리에 작은 둥지를 틀고 근대성, 동아시아, 고전문학 등을 주제로 하는 세미나와 강좌를 연 것도 이 즈음이었다. 신기하게도 아무런 이념도 목표도 없었건만, 날이 갈수록 ‘유붕자원방래(有朋自遠方來)’하는 기적이 연출되었다. 몇 번의 공간이동을 통해 연구실은 차츰 ‘지식인 꼬뮌’으로 자신의 꼴을 갖추어 갔다. ‘아무도 기획하지 않은’ 실험!

연암을 만난 것도 이 과정에서였다. 대학로 석마빌딩 시절, 그린비 출판사에서 연구실 친구들에게 ‘리라이팅 클래식’이라는 기획을 제안해왔다. 고전을 ‘지금 여기’와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면서 새로운 글쓰기를 창안하는 야심찬 기획이었다. 나는 오로지 고전문학연구자라는 이유만으로 열하일기를 떠맡게 되었다. 생은 길섶마다 예기치 않은 행운들을 숨겨놓는다고 했던가. 그것은 내 공부의 여정에 또 한번의 변곡선을 그었다. 여행의 스릴과 서스펜스, 거대한 문명적 비전과 심연을 투사하는 시선, 범람하는 유머와 패러독스 등등. 마치 달려가도 달려가도 닿을 수 없는 지평선을 마주했다고나 할까.

혹은 들뢰즈/가따리가 말한 바, ‘시작도 끝도 없이, 정상도 목표도 없이 무한히 펼쳐지는 고원’의 경지라고나 할까. 조선후기를 전공했으면서도 대학원 시절에는 얼핏 스쳐지나갔을 뿐인 열하일기의 진면목을 아주 먼 우회로를 거쳐 비로소 엿보게 된 것이다. 그때 이후 연암 박지원은 내 평생의 사우(師友)-스승이면서 친구이고 친구이면서 스승인 존재-가 되었다. 그리고 그를 통해 이탁오에서 허준, 노신, 달라이라마에 이르기까지 탈근대의 드넓은 비전을 제시해줄 스승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근대 이전, 학인들은 스승을 찾아 천하를 떠돌았다. 좋은 스승을 만나면 그야말로 ‘인생역전’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 이전에 스승을 찾아가는 과정 자체가 이미 훌륭한 공부였으리라. 근대적 지식에는 결정적으로 이런 과정이 생략되었다. 운좋게도 나는 처음 공부를 시작할 때부터 지금까지 수많은 스승들을 만났다. 연구실을 연 이후엔 그 덕택에 내 평생의 공력으론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스승과 동학들을 만날 수 있었다. 이제는 알 것같다. 공부란 그렇게 열정과 신뢰 속에서 스승과 제자가 함께 구성해가는 것임을.

연구실에서 공부는 일상과 분리되지 않는다. 공부가 일상이고, 일상이 곧 공부다. 바로 그 때문에 일상은 곧바로 혁명이 된다. 물론 여기서 혁명이란 바리케이드 위에서, 적대적 투쟁 속에서 자신을 표현하는 그런 류가 아니라, 언제 어디서건 존재의 생성과 변이를 가능케 하는 유목적 여정, 바로 그것이다. ‘인간’이라는 경계조차 넘어 우주와 소통하는 구법(求法)의 여정이 될 수 있는 것도 그때문이다. 연구실의 이웃이자 큰집이기도 한 가산불교문화연구원의 지관(智冠) 큰스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불교에 외부란 없다. 따라서 불교에서 개종이란 자비심을 잃는 것을 뜻할 뿐”이라고. 어설픈 모방이지만 나도 이렇게 말하고 싶다. “공부에 외부란 없다. 공부는 원초적 본능이자 삶의 모든 과정”이라고. 하여, 세상에는 두 가지 선택만이 있을 뿐이라고.- “공부하거나 존재하지 않거나!”

왕태석 기자

■ 고미숙씨는…

1960년 강원도 정선에서 태어났다. 대학(고려대)에서 독문학을 전공하던 중 한국 고전문학에 매력을 느껴 내처 박사학위까지 받았다.

이후 그는 대학 강단을 공부하는 곳으로 찾지 않고 1997년 공부하는 이들끼리 모여 '수유연구실'을 만들었으며 이것이 나중에 비슷한 연구집단인 '연구공간너머'와 결합하며 2000년에 연구ㆍ생활공동체인 '연구공간 수유+너머'로 탄생했다. 이곳은 제도권의 협소한 범주에 속하지 않는 다양한 사람들의 연구하고 생활하는 공간이자 끊임없이 세미나와 토론회가 열리는 곳으로 현대판 서원이 되었다. 그 역시 이 곳에서 프랑스 현대철학의 눈으로 고전을 다시 보게 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연구공간 수유+너머는 작년에 고미숙씨가 미 코넬 대학 동아시아 연구소 초청으로 방문연구한 것을 계기로 코넬대와 한국학 공동연구가 진행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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