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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회 여성생활수기 우수작 양정숙/ 연필을 깎아주는 남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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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회 여성생활수기 우수작 양정숙/ 연필을 깎아주는 남편

입력
2005.06.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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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세 고등학교 1학년 학생,

주부, 아내, 어머니라는 평범한 신분 외에 붙은 또 다른 나의 정체이다.

여느 고등학생들이 꿈과 목표를 가지고 열심히 공부하듯이 나 또한 젊은이 못지않은 꿈과 목표를 가지고 공부하는 주부이자 아내며 어머니이며 학생이다. 나에게 주어진 각각의 신분이 소중하고 그 신분들을 잘 지키기 위하여 어느 부분도 소홀히 해서는 안되겠지만 지금 내가 가장 많은 시간을 들이고 중점을 두는 것은 학생 신분이다. 가정 일을 소홀히 할 수밖에 없는데 그 자리를 남편과 아들이 도와주고 있어 나는 마음 편히 공부에 전념할 수 있다.

남편은 고마운 사람이다. 어느 날 한문 시험공부를 하고 있는데 남편이 조금 쉬었다 하라며 수필집을 건네준다. 바쁜 마음에 거들 떠도 안보는 나에게 건강을 위해서 쉬어야 한다며 수필집을 직접 읽어준다. 그 수필은 남편 친구의 아내가 쓴 글이었다. 수필집을 낸 기념으로 남편에게 보내온 책이었는데 읽다가 내용이 재미있다며 페이지를 접어서 읽어보라고 한 것이다. 남편이 읽어주는 내용은 재미도 있었지만 내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그녀의 약력 란, 눈길을 뗄 수가 없었다. 명문 여자 대학교 국문과 졸업, 그 뒤에도 화려한 그녀의 약력은 갑자기 나 자신을 위축되게 만들었고 남편마저 나로 인해 초라하게 느껴져 참으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절친한 친구의 아내는 작가의 길을 걷고 있는데 나는 이제 고등학생 신분으로 한자 시험공부 한다며 살림도 제대로 못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한 나의 속마음을 간파한 듯 남편은 뭉뚱해 져 있는 나의 연필을 한 움큼 쥐며 “내가 연필 깎아 줄께” 하며 사각사각 연필을 예쁘게도 깎아준다. 연필 깎는 소리가 얼마나 듣기 좋았던지….

거실에 나와 하늘을 바라보니 별이 빛나고 있었다.

아들이 초등학교 다닐 때에도 남편은 아들의 연필을 늘 예쁘게 깎아주었다. 연필을 깎아주고 호연지기를 키우려고 산으로 들로 바다로 데리고 다녀서 일까? 아들이 중학교 다닐 때 학교에서 가장 존경하는 인물을 발표하라고 하니 친구들은 “이순신 장군이요, 세종대왕이요.” 했다는데 아들은 “우리 아버지입니다.” 했다고 한다. 25살이 된 지금도 아들의 존경순위는 1위는 아버지라고 한다.

남편과 아들은 나에게 공부를 계속해서 할 것을 권한다.

열정뿐이지 기억력이나 암기력이 따라주지 않아서 힘들어 하는 모습을 보이면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쉬엄쉬엄 건강을 생각하며 느긋하게 하라고 격려한다. 그 열심이면 대학교는 물론 대학원 석사 박사 학위도 취득할 수 있다며 힘과 용기를 준다. 아들 또한 “어머니 나이는 숫자에 불과한 거예요. 미국인들은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실행하고 있어요. 90세가 넘으신 할머니 할아버지께서 끊임없이 독서를 하고 교회에서 피아노 반주를 하며 운전을 하며 살고 있어요. ’ I am proud of you.’ 하며 공부하는 어머니가 자랑스럽다고 영어를 한 마디 가르쳐 준다.

3년 전에 시어머니께서 많이 편찮으시다가 하나님 품으로 돌아가셨다. 몸을 전혀 가누지 못하는 어머니의 대소변을 치우고 병간호하느라 지친 나에게 남편은 늘 활력소를 가져 다 주었다. 직장에서 돌아온 남편은 “부인 얼마나 힘드십니까?” 정중하게 인사를 하며 유머를 쪽지에 적어와서 재미나게 읽어 주었다. 몇 편의 유머를 듣고 있노라면 피로가 풀리는 것 같았다. 남편은 거의 매일 직장 동료들이나 잡지에서 나에게 들려줄 몇 편의 유머를 수집하여 가지고 왔다. 내가 깔깔거리고 웃으면 남편은 어머니의 쇠약해진 팔과 다리를 주무르던 손으로 나의 어깨를 주물러 주었다.

지난 4월 5일 화요일, 봉사활동을 위해서 아침 일찍 집을 나왔다. 휴일이라 남편은 집에서 KBS TV 아침마당 프로를 시청하였다고 한다. 젊은 부부의 아름다운 이야기였는데, 암에 걸린 아내를 깊은 사랑과 정성으로 간병을 하였다는 이야기, 그러한 남편에게 감사하는 아내의 모습이 얼마나 감동을 주는지 눈물이 날 정도로 아름다웠노라고 집에 돌아온 나에게 들려주었다. 아름답게 사는 부부들의 이야기, 모범적인 가정의 이야기를 방송이나 신문에서 보여주고 들려주어 힘들고 어렵게 살아가는 부부들에게 귀감이 되게 하여야 한다며, 다시 한번 그 프로를 보고싶다고 했다. 그리고 남편은 말했다. “우리도 더욱 아름답게 삽시다.”

나는 학교에서 재미있었던 이야기를 남편과 아들에게 들려준다. 오늘은 학교에서 이런 일이 있었고 저런 일이 있었다고 얘기하면 남편과 아들은 들어준다. 말을 아끼던 내가 학교를 다니면서부터 수다쟁이가 된 것이다. 나는 말이 별로 없는 편이었다. 말 잘하는 사람을 부러워하며 말주변이 없는 자신을 부끄러워하는 나에게 남편은 “말도 연습이야, 자꾸 하다 보면 잘 할 수 있어”하며 용기를 주곤 했었다. 이제는 학교생활 이야기를 하지 않는 날이면 오히려 남편이 묻는다. “오늘은 학교에서 뭐 즐거운 일 없었소?“ 대수롭지 않은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며 즐거워하고 가족의 소중함을 생활에서 드러내는 남편이 참으로 고맙게 느껴진다.

결혼 초에 남편에게 나의 가난했던 초등학교 시절 이야기를 하였다. 기성회비를 내지 못해서 집으로 돌려보내는 창피를 당했던 이야기. 그러나 같은 반의 대학교수 딸 신해령, 은행원의 딸 박경희라는 친구들은 기성회비를 내라는 통보를 받으면 그 다음날 빳빳한 새 돈으로 기성회비를 내곤 했었다. 그것이 어린 마음에 얼마나 부러웠었는지….

그 이야기를 들은 남편은 그 달부터 25년 동안 빳빳한 새 돈과 짧은 편지가 들어있는 월급봉투를 건네주었다. 나는 빳빳한 새 돈으로 고등학교 입학금을 낼 수 있었다. 25년 동안 남편은 매월 짧은 글을 주었다. “ 적은 돈으로 알뜰하고 규모 있게 생활을 꾸려 가는 아내가 고맙다, 어머니께 효를 다하며 살자, 힘들고 어려운 일들을 잘 극복해 나가자, 하나님께 감사하는 삶을 살자…” 때때로 자작시를 지어주었다. 붓으로 예쁘게 써서 봉투에 담아 건네준 글들을 나는 보물인양 간직하고 있다. 언젠가 책으로 엮어보리라…. 25년이 넘는 세월 몇 줄의 편지와 새 돈이 든 월급봉투를 건네주는 남편의 따뜻한 마음이 늘 고맙고 기다려져서 나는 항상 부자처럼 살았다.

다음 글은 남편이 2005년 4월 15일 월급봉투와 함께 나에게 건네준 짧은 편지 내용이다.

사랑하는 나의 아내 정숙.

개나리 진달래 목련이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봄이요.

80년 봄 시범아파트 등성이에도 개나리가 노랗게 피어나고 있었지요. 당신은 귀여운 아기를 낳고 그 날 하나님께서 일용할 양식을 주셨지요. 그때부터 지금까지 일용할 양식을 끊임없이 주셔서 배부르게 먹고 건강하게 살아왔죠.

아기를 낳던 젊은 날은 봄날처럼 가버리고 이제 육신은 약하여 가지만 우리의 사랑은 더욱 익어가고 있지요. 당신을 사랑하게 된 것은 아름다운 복이요.

샘솟는 기쁨을 준 당신. 오랜 세월 고맙고 감사하고…

우리 하나님께서 일용할 양식을 주셨습니다.

2005년 4월 15일 남편.

80년 봄 우리는 참으로 가난하였다.

숨이 차도록 한참을 올라야 하는 산동네 작은 아파트, 버스 값을 아끼기 위해 우리는 땀을 흘리며 가파른 길을 걸어 올라야 했다. 4월 15일은 남편의 봉급날이며 아들이 태어난 날이다. 출산 날이 다가와도 아기의 이불이며 옷이며 아기용품을 살 돈이 없어서 준비를 못하고 15일 월급을 타면 예쁜 아기의 용품을 사려고 미루고 있었는데 그 날 아침 아이를 낳았다. 그 때 낳은 아들이 이제는 장성하여 청년이 되었다. 머지 않아 아들도 결혼을 하게 될 것이다. 오랜 세월 따뜻하고 포근한 글, 때로는 따끔한 가르침의 글, 격려와 위로의 글을 담은 아버지의 편지를 아들에게 보여주고 자랑하였다. “너도 장가들면 네 아내에게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아버지처럼 하여라” 아들이 대답한다. “예 잘 알았습니다.” .

많이 배우지 못하여 부족하고 모자라는 것이 많은 아내를 업신여기지 않고, 오히려 열등감을 느끼며 의기소침해 있을 때 위로해주고 사랑으로 감싸주는 남편이 한없이 고맙게 느껴진다. 부부란 서로에게 부족한 점이 있어도 탓하기 전에 이해하고 아픈 부분을 감싸주며 사랑하며 인격을 존중하며 사는 것이라며 오랜 세월 변함 없이 본을 보여준 남편이다. 그 동안 응석 부리고 받기만 하고 철없이 굴었던 점들을 사과하는 마음으로 남편이 좋아하는 음식을 만들어 대접해야겠다.

■ 우수상 양정숙씨

여성 생활 수기 우수상 수상자 양정숙(梁貞淑)씨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수상의 기쁨도 잠깐, 가난 때문에 초등학교 밖에 못 나온 자신의 학력이 알려지면 사회 생활하는 남편에게 누가 되지는 않을 까란 걱정으로 밤잠을 설쳤다는 첫 마디였다. 얼굴에는 여전히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남편은 축하한다며 격려해 줬지만 전 알거든요. 항상 본인보다는 제 입장을 먼저 생각해 주는 사람이란 걸…정말 기대도 안 했던 상이라서 너무나 기쁜데 남편한테 미안한 마음 또한 참 크네요.” 주부들을 위한 정규 중학 과정을 마치고, 같은 프로그램중의 일성여고 1학년 과정에 재학중인 양정숙씨의 목표는 대학 입학이다. “영문과에 진학하고 싶어요. 영어 선생님이 되고 싶다면 너무 꿈이 큰 것 이겠지요? 내 나이가 50인데…, 그래도 대학은 꼭 들어 갈 겁니다. ”

그는 학교 이야기가 나오자 표정이 밝아졌다. 말수가 적었던 그는 학교를 다닌 후부터 수다쟁이가 됐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남편과 아들에게 학교에서 있었던 재미난 일을 말해주는 게 생활의 일과처럼 돼 버렸어요. 같이 깔깔거리며 웃지요.”

늦깎이 여학생들의 생활은 여느 여고생들과 다를 바가 없다. 쉬는 시간마다 조잘 조잘 떠들고 2교시가 끝나면 밥을 까먹고 공부보다는 노는데 관심이 많은 학생, 이른바 ‘깻잎’도 있다. “너무 웃기죠? 딱 17, 18살 여고생 교실이에요. 학교 가는 게 생활의 활력소랍니다.”

양정숙씨는 멋진 대학생을 꿈꾸며 오늘도 더 열심히 살겠다고 다짐했다. 또, 그는 수기 공모 기회를 마련해 준 학교 선생님들에게 감사하다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조윤정기자 yjch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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