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시간 반의 지루한 뱃길이 끝나고 마침내 여객선 객실 문이 열렸다. 갑갑함에서 풀려난 승객들은 눈 앞에 등장한 분홍빛 암벽에 깜짝 놀라 멈춰섰다. 이럴 때, 언어는 뒷전이다. 그저 얼굴 표정과 “와~, 와~” 탄성만으로 감흥을 전할 뿐이다.
한국 해벽미(海壁美)의 정수라 불리는 홍도다. 천혜의 비경이 붉은 보석처럼 빛나는 곳. 직접 눈으로 보니 절경은 유명세 이상이다.
둘레 20.8㎞의 작은 섬이지만 그 곳에 압축된 아름다움은 언어를 초월한다. 1965년 일찌감치 섬 전체가 천연 기념물로 지정될 법도 했다.
홍도33경이라 통칭되는 절경은 모두가 바닷가로 둘러 있다. 유람선을 타야만 하는 이유다. 유람선에서 내려다 본 홍도의 바닷물은 옥빛으로 은은했다. 이 물은 7월이 되면 더욱 맑아져 10m 아래까지 투명하게 보인다고 한다.
홍도에는 1구, 2구 등 달랑 두 개의 마을뿐. 중심 마을인 1구 어귀를 돌자마자 기암 영봉들이 물에 잠겨있다. 바다에 뜬 금강산이다. 유람선 가이드는 “저 구멍뚫린 바위가 TV 애국가에 나오는 남문바위입니다. 기념 사진을 찍으려면 지금 배경 삼아 찍어야 합니다”라며 수선이다.
남문바위부터 홍도33경이라 부르는 절경의 파노라마가 본격 시작된다. 붉은 빛 감도는 기묘한 생김새의 바위, 절벽들. 암벽 위는 푸르름으로 가득했다.
툭툭 굵어진 해송이 해벽 위를 덮은 모습이 신령스럽기까지 하다. 지난 겨울, 봄 붉은 동백이 가득했던 산자락은 곧 여름이 오면 노란 원추리 꽃으로 수 놓이겠지.
실금리굴, 석화굴, 일곱남매바위, 거북바위…. 띄엄띄엄 떨어져 있더라면 하나 하나가 보석같았을 암석 덩이가 여기서는 숨쉴 틈 주지 않고 이어지니 정신이 없을 지경이다. 가끔 치솟은 바위에는 퇴적층 자국이 고스란히 물결쳐 온다. 하늘로 치켜 뜬 그 무늬는 억겁의 세월 동안 시간의 물결이 쳐 올린 흔적일까.
절반쯤 돌면 홍도의 남은 동네 2구 마을이다. 언덕 위에 작고 하얀 등대가 올라서 있다. 인공물마저 몸을 낮춰 자연의 일부가 되는 곳. 마음의 긴장이 절로 풀어지는 풍경이다.
섬 일주를 마치고 부두로 들어서려는 찰나, 태양이 마을 너머로 마지막 빛을 뿜는다. 가뜩이나 붉은 홍도, 아예 선홍빛 불덩이로 타올랐다.
홍도=글ㆍ사진 이성원기자 sungwon@hk.co.kr
■ 길에서 띄우는 편지/ 홍도
섬으로 떠나는 여행은 다릅니다. ‘단절’이 주는 감동의 깊이 때문입니다. 섬 위에 맴도는 아련한 그리움을 뭍의 어느 것에 비할 수 있겠습니까.
홍도로 향하는 배 안에는 아주머니들이 많았습니다. 주중이라 가족 관광객 보다는 계 모임이나 이웃, 동창끼리 많이 찾은 듯 합니다. 얼마 가지 않아 바닥 여기 저기서 고스톱 판이 벌어졌습니다.
긴 뱃시간 무료함을 달래고 울렁이는 뱃멀미를 잊어 보려는 몸짓이었겠죠. 단잠을 방해하는 소리들을 애써 외면했습니다.
그들과의 동행은 홍도에 도착해서도 계속됐습니다. 바로 홍도 유람선으로 갈아 탔고, 잇단 절경에 비슷한 탄성이 터졌습니다. 연이은 감탄에 조금 지쳐 갈 무렵, 작은 어선 한 척이 맹렬히 달려 왔습니다.
유람선에 배를 대고 즉석에서 회를 썰어 파는 고깃배였죠. 장삿속이 뻔히 보였지만 사람들은 그것도 재미라며 서로 먹겠다고 줄을 섭니다. 때 맞춰 유람선에서는 다 준비해 뒀다는 듯 뽕짝이 울려 퍼졌죠. 회 한 점, 소주 한 잔을 걸친 아주머니들이 더는 못 참겠다는 듯 덩실대기 시작합니다.
‘왜들 저럴까. 꼭 저런 식으로 밖에 놀지 못하는 걸까.’ 의문은 짜증으로 증폭되고 눈살은 절로 찌푸려졌습니다.
그러길 몇 분, 건너편 바위섬 위로 해가 넘어 가기 시작했습니다. 노을에 눈이 바래기라도 했던 걸까요, 벌겋게 물든 선상에서 벌어진 춤판이 다른 이미지로 다가왔습니다.
몽환 속 그림처럼, 슬로 비디오로 보여지는 영화처럼. 그들의 춤사위는 이를 테면 씻김굿이었습니다. 엄숙한 제의 같은 것이었습니다. 무엇을 씻어내고, 털어내려고 그 먼 길을 달려 온 걸까.
보석 같은 풍경에 취해 저의 짜증 또한 눈 녹듯 사라졌습니다. 저나 덩실대는 그들이나 홍도에 어지간히 반했나 봅니다.
유람선에서 내릴 때 까지는 좋았는데, 그 여흥을 깨는 소리 한 줄기. “언니, 오늘 밤 나이트서 계속 흔들어 보자고.” 춤을 향한 아주머니들의 일로 매진 덕에 홍도는 밤새 들썩거렸습니다.
이성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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