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넘게 가면 뒤에 숨어 있던 딥 스로트(deep throatㆍ익명의 핵심 정보 제공자)가 연방수사국(FBI) 2인자였던 마크 펠트(92) 전 부국장으로 밝혀지면서 워터게이트 사건의 의미도 재평가될 전망이다.
워터게이트는 권력자의 도덕적 사표(師表)를 설정한 기준이고, 동시에 미국 정치사에서 제왕적 대통령제를 끝낸 역사적 전환점이었다. 또 언론사에선 권력을 고발하는 탐사보도의 기념비적 존재다.
그러나 펠트가 왜 고발에 나선 동기를 놓고 사건 자체를 처음부터 다시 살펴봐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등 파장은 한 동안 미국 정치권과 언론계를 크게 뒤흔들 조짐이다.
펠트가 업무 중 취득한 정보를 공개해서는 안 된다는 복무규정을 어기면서까지 워싱턴 포스트 기자들을 만난 이유는 백악관과 FBI의 힘 겨루기의 결과라는 분석이 많다. 밥 우드워드도 31일“펠트는 백악관과 FBI의 긴장관계에 있던 시점에서 워싱턴 포스트를 도왔다”고 인정했다.
사건 당시 백악관과 FBI는 사사건건 부딪혔다. ‘제왕형 대통령’인 닉슨의 백악관은, 역대 대통령을 도청하고 장관을 사찰까지 하면서 권력을 키워온 FBI를 놓아두지 않았다.
워싱턴 포스트에 따르면 1972년 3월 통신회사 ITT가 자사에 대한 독점금지법 소송을 없던 일로 하는 대신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대선 자금으로 40만 불을 제공했다는 메모가 공개됐다. 당황한 백악관은 FBI 에드가 후버 국장에게 이 메모가 사실 무근인 것으로 발표하라고 압박했지만 조사를 담당했던 펠트와 후버 국장은 “그럴 만한 증거가 없다”며 버텼다.
71년에도 FBI는 닉슨 정부의 국내 보안 유지 정책에 대한 기밀을 누설한 범인을 찾기 위해 대대적인 도청과 거짓말 탐지기 작업을 실시 해야 한다는 백악관의 요청을 거절했다.
후버 국장이 사망하자 닉슨 대통령은 후임 국장에 패트릭 그레이 법무부 차관보를 앉히고 FBI 장악을 시도했다. 펠트는 “그레이는 모든 정보를 백악관에다가 갖다 받쳤다”면서 “이는 우리의 단결을 해치는 짓으로 여겼다”고 밝혔었다. 게다가 펠트 개인적으로는 자신이 FBI의 우두머리가 될 것이라는 야심을 키우고 있었다.
평가가 엇갈리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닉슨 대통령의 연설문 작성자인 패트릭 부캐넌은 “펠트는 반역자”라고 비난했다. 반면 워터 게이트 상원 청문회에 참여했던 테리 레즈너는 “그가 아니었다면 진실은 파묻히고 말았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워터 게이트 특별 검사팀의 멤버였던 리처드 벤 베니스트는“내부 고발자의 중요성이 훼손돼서는 안된다”며 “특히 정부 관계자일 경우는 더욱 그렇다”고 밝혔다.
박상준기자 buttonpr@hk.co.kr
■ 우드워드-번스타인도 입 열어
딥 스로트가 누구인지에 대해 철저히 침묵을 지켜왔던 워터게이트 특종 보도의 두 주인공 밥 우드워드(62)와 칼 번스타인(61)도 31일 입을 열었다. 그들은 올 2월 사건 33년 만에 취재자료를 공개하면서도 “취재원이 죽을 때까지 공개하지 않기로 했다”며 딥스로트 관련 문서를 제외했었다.
현재 워싱턴 포스트 부국장인 우드워드는 마크 펠트의 가족들이 사실을 공개하려 한다는 것을 사전에 알고 있었지만, 전날 잡지 베니티 페어가 처음 보도할 때만 해도 사실 확인을 거부했다. 그러나 곧 우드워드와 칼스타인, 벤 브래들리 당시 편집국장(현 부사장)은 협의를 거쳐 “신문(워싱턴 포스트)이 펠트와의 약속을 이행할 의무에서 벗어났다”며 딥 스로트의 신원을 확인해주었다. 우드워드는 뉴욕 타임스 등 다른 언론의 취재 요청에는 응하지 않았으나, 워싱턴 포스트 2일자에 워터게이트 사건 보도 과정에 대한 상세한 기사를 게재할 예정이다.
우드워드는 1972년 리처드 닉슨 대통령 선거 캠프의 워터게이트 도청 의혹을 폭로한 특종으로 퓰리처상을 수상하고, 덕분에 ‘탐사보도’의 대명사로 유명해졌다. 미국에서는 정ㆍ재계 고위 인사들과 두터운 친분을 토대로 미국 핵심 권력의 막후를 폭로하는 ‘내부자 보도’에 능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80년대 중반 워싱턴포스트가 보도한 10대 초반 아동의 마약 중독을 다룬 ‘지미의 세계’가 완전 날조였다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지면서, 우드워드는 담당 부장으로서 명성에 큰 상처를 입었다.
우드워드는 80년대 후반 이후 백악관 중앙정보국 연방대법원 등 미 권력기관의 내부에 대한 심층 취재와 집필을 계속하고 있으며, 지난해에도 조지 W 부시 행정부의 이라크전 비화를 다룬 ‘공격 시나리오’로 화제를 모았다.
문향란기자
■ 결국 닉슨 사임 불러
워터게이트 사건은 1972년 6월 17일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재선을 위해 비밀공작반 ‘배관공팀(Plumbers)’이 워싱턴 서쪽 워터게이트 빌딩의 ‘민주당 전국위원회(DNC)’ 본부 사무실에 무단 침입해 도청장치를 설치하려다 발각된 사건이다. 처음에는 단순 주거침입으로 주목 받지 못했지만 2년 후 미국 역사상 전무후무한 대통령 사임이라는 결과를 가져왔다.
배관공팀은 원래 정보의 언론유출을 막기 위해 운영되던 조직이었다. 그러나 당시 닉슨 재선 캠프에서 재정을 담당했던 고든 리디 전 연방수사국(FBI) 요원은 25만 달러를 받고 쿠바계 미국인 4명과 미 중앙정보부(CIA) 기술담당 제임스 맥코드 요원 등 7명을 DNC에 침투시켰다. 체포된 일행을 통해 백악관에 근무한 CIA 요원 하워드 헌트 등이 연루된 사실이 밝혀지면서 백악관 도청사건으로 비화되기 시작했다.
특히 닉슨 전 대통령은 CIA를 이용해 FBI의 조사를 무마하려 했다는 사실이 백악관 내 비밀테이프를 통해 폭로돼 물러설 곳이 없어졌다. 그는 1974년 7월 하원 사법위원회에서 탄핵결의가 가결된 후 8월 8일 스스로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다. 대통령직을 승계한 제럴드 포드는 9월 8일 닉슨을 모든 죄에 대해서 특별사면했지만, 스스로 역풍을 맞아 재선에서 고배를 마셨다.
고성호 기자 sungho@hk.co.kr
■ 마크 펠트는 누구
마크 펠트는 리처드 닉슨 전 대통령과의 마찰만 없었다면 미 연방수사국(FBI) 국장 자리를 차지했을 인물이다. ‘FBI의 황제’ 에드거 후버의 측근이자 2인자로서 국장 자리를 노렸고, 시국사범에 대한 사찰도 벌였다. 이 때문에 그의 고발은 정의를 위한 결단이 아니라는 비판도 일고 있다.
‘딥 스로트’는 1972년 린다 러브레이스 주연으로 미국에서 개봉돼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최초의 합법적 포르노 영화(한국제목: 목구멍 깊숙이)의 제목이다. 같은 해 워터게이트 사건이 터지고 워싱턴 포스트의 특종이 잇따르자 누군지 모를 제보자에게 이런 별명이 붙었다. 펠트도 거명됐으나, 그는 79년에 펴낸 회고록 ‘FBI 피라미드’에서 이를 극구 부인했다. .
밥 우드워드와 칼 번스타인의 저서 ‘대통령의 사람들(All the President’s Men)’에서도 그는 베일에 가려졌다. 접촉은 비밀리에 진행했다. 우드워드는 딥 스로트와 모두 7차례 만났으나 전화통화를 불신해 대개 새벽 2시 지하주차장에서 접선했다. 빨간 기를 꽂은 화분이나 배달되는 뉴욕 타임스에 시계를 그려넣는 식으로 날짜를 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펠트는 아이다호대, 조지워싱턴대 법학대학원을 졸업한 뒤 42년부터 73년까지 FBI에 몸담았다. 62년 본부로 복귀한 이후 후버 국장의 신임을 얻어 출세가도를 달렸고 72년 5월 후버가 사망한 뒤 차기 국장을 꿈꾸었으나 낙마, 영원한 2인자로 남게 됐다.
그는 FBI 재직 당시 좌파 학생운동 멤버 지인의 집을 영장 없이 수색토록 허가한 일 때문에 78년 불법 주거침입 혐의로 기소돼 80년 유죄판결을 받았다. 2001년 심장발작을 일으킨 뒤 현재는 건강이 악화하고 기억도 쇠퇴한 것으로 알려졌다.
문향란 기자 iam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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