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양을 막론하고 국가운영에서 공신(功臣)을 어떻게 다루고 처리해야 하는 것인가 하는 문제는 권력자의 최대 숙제였다. 권력은 한 사람의 힘만으로 창출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 문제는 국가가 생긴 이후 현재까지 끊임없이 생겨나고 있다.
대통령제에서는 ‘선출된 군주’의 속성을 지니는 대통령선거에서 공을 세운 선거 참모들과 각종의 지원과 자문을 한 세력들이 공신에 해당한다.
역대 군주들은 공신에게 고관대작을 주기도 하고, 관직에서는 멀리 두되 재물을 주어 처리하기도 했다. 군주가 공신을 장악하여 국정을 잘 이끈 경우도 있었고, 군주를 업신여긴 공신들이 득세하여 그들만의 배를 채우다가 나라를 망친 경우도 있었다.
권력자와 공신들의 관계를 보면, 공신은 여러 형태로 권력창출의 지분을 요구한다. 특히 위기상황에서 권력을 창출하거나 쿠데타 또는 혁명과 같은 집단적 권력창출의 상황에서는 공신은 권력자와의 관계에서 리더와 추종자의 관계에 있지 않고 동업자의 지위에 있기 때문에, 자신들이 권력자라고 생각하고 권력자의 권한과 힘을 자신들이 행사하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나폴레옹은 강력한 지도력을 가졌기 때문에 재물로 공신을 제압하되 관직에는 천하의 인재들을 등용할 수 있었지만, 태종 이방원은 비상수단을 동원하여 비대한 공신세력을 척결하고 참신한 인재를 양성하여 세종시대의 길을 열었다.
-盧정권도 공신 처리 잘못
군주국가든 민주국가든 권력의 본질적 속성은 동일하기 때문에 공신과 권력자의 문제는 반복해 등장하고 국정운영의 배후에는 항상 이 문제가 가로 놓여 있다. 우리의 경우 민주화이후 세 번의 정부를 맞이하였지만 국정운영에서 혼란을 반복하고 있는 것에는 공신의 문제가 제대로 해결되지 않은 것에 큰 원인이 있다.
역대 정부에서 권력자의 주위를 보면 재미있는 현상이 발견된다. 공신들은 제각기 자기가 아니었으면 대통령이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한다. 대통령이 유능해서가 아니라 자기들이 대통령을 만들었다고 한다.
권력창출의 지분이 있기 때문에 자리와 부귀영화도 나누어 야 한다고 하는가 하면, 자신이 사실상의 대통령이라며 온갖 월권을 하고 대통령이나 할 수 있는 말과 행동을 서슴지 않고 하기도 한다. 대통령은 무엇을 모르기 때문에 자기가 대통령의 선생이 되어야 한다고 하는 가당찮은 지식인들도 여럿 보았다.
무슨 위원장 자리 하나만 맡아도 이런 생각을 하는 것 같다. 더구나 요즘 공신은 범위도 넓어져 권력창출에 직접 연관이 없는 자들까지 기부금을 냈다거나 아이디어를 주었다거나 지역 선후배라거나 하며 거들먹거리는 ‘자칭공신’들까지 생겨나 온갖 이권에 개입하고 청탁한다.
김영삼 정부나 김대중 정부에서도 이 공신의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여 ‘그들만의 나라’로 전락하다가 결국 대형 부정부패와 권력형 비리로 점철된 실패의 대통령으로 추락했다. 이너 서클만으로 국정을 운영하여 성공한 예는 유사이래 한번도 없다는 것이 역사의 교훈임에도 현 정부 역시 그전 정부들보다 더 심하게 ‘그들만의 나라’로 질주하고 있다.
오늘날 자유민주국가에서는 적과 동지의 이분법으로 국정운영을 할 수 없음에도 여전히 시대착오적인 이항대립과 언어선점의 전술(!)에만 의존하여 정권을 유지하려고 한다.
-더 늦기 전에 새 인물을
임기 반을 넘기면서도 국정운영 시스템이 구축되지 못한 것, 대통령 측근들의 비리가 속출하고 있는 것, 대통령이 점점 ‘벌거벗은 임금님’의 희화적인 모습으로 국민에게서 멀어져 가고 있는 것은 결국 ‘노무현도구론’과 ‘동업자론’에 기초하고 있는 공신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데 근본원인이 있다. 더 늦기 전에 진정 ‘no’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을 찾아야 한다.
정종섭 서울대 법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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