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신문 ‘광복 60주년 여론조사’에 따르면, 정치인에 대한 신뢰도 조사(10점 만점)에서 응답자 1,000명중 385명이 0점을 매겼으며, 5점 이하의 낙제 점수를 준 응답자가 전체의 91.6%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 정도면 ‘정치 불신’이나 ‘정치 혐오’를 넘어 아예 ‘정치 저주’라고 해야 어울릴 듯하다. 그런데, 과연 그런 평가는 온당한가? 최근 번역ㆍ출간된, 독일 사회학자 헤르만 셰어의 ‘정치인을 위한 변명’을 읽어보고 나서 답하는 게 좋을 것 같다. 말을 좀 풀어 써서 몇 가지 주장을 소개하자면 이렇다.
사람들이 모여 만든 모든 종류의 조직에서 흉한 권력다툼이 벌어지지만 오직 정치판의 싸움만이 늘 공개되며 잘 팔리는 언론 상품이 된다. 세상 사람들 중엔 이런 사람도 있고 저런 사람도 있으나, 정치인들에 대해선 그런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정치인들에겐 보편적인 인간적 기준마저 허용하지 않는다. 대중에게 접근하려는 모든 시도를 표를 노린 걸로만 보면 모든 정치적 대화는 불가능해지지만 언론과 대중은 그 점에 아랑곳하지 않고 정치인들을 악의적으로만 해석하기에 바쁘다.
꼭 한국의 유권자들 들으라고 하는 소리 같다. 한국 정치인들이 한심하고 못난 건 분명한 사실이겠지만 유권자들도 큰 소리 칠 건 못 된다. 워낙 대중에 대한 아첨이 난무해 유권자들은 스스로 잘난 걸로 착각할지 모르겠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충동적인 것도 문제지만, 가장 나쁜 건 자기들의 선택에 대해 책임지는 법을 모른다는 것이다.
한국정치와 관련된 불멸의 진실 하나는 누굴 여의도에 갖다 놓아도 곧 손가락질을 받는 한심한 인간으로 전락하게 돼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건 정치인 책임이 아닐 것이다. 뭔가 다른 데에 이유가 있을 것이다. 누적된 역사적 모순과 갈등으로 인해 정치에 과부하가 걸려 있다는 게 문제의 핵심일 것이다.
바로 이 점에서 노무현 정권과 열린우리당의 행태가 문제가 된다. 노정권과 열린우리당이 스스로 역설하는 그들의 공적을 100% 수용해 그들을 종합적으로 긍정 평가한다 해도 한가지 비판받아 마땅한 게 있다. 그것은 그들이 정치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 이상의 것을 자기들이 해내겠다고 큰소리를 쳐왔다는 점이다. 지킬 수도 없고 지킬 뜻도 없는 허풍을 너무 쳐댔다. 거의 ‘나르시시즘’ 수준이었다. 일시적으론 재미를 보았을지 모르겠지만, 속된 말로 그간 열심히 자기 무덤을 파온 것이다.
언론도 면책될 수는 없다. 무엇보다도 싸잡아 욕하는 버릇을 버려야 한다. 며칠 전 지난 4ㆍ30 재보선 결과 달라진 정당간 의석 수에 따른 국회 상임위 구성의 재조정 문제로 여야가 갈등을 빚고 있다는 내용의 텔레비전 뉴스를 시청하다가 혀를 끌끌 차지 않을 수 없었다. 기자의 결론은 여야가 ‘밥그릇 싸움’을 한다는 것이었다. 시청자로서 내가 궁금했던 건 국회 법ㆍ규칙ㆍ전례는 어떤가 하는 것이었다.
그걸 알아내 보도하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이다. 가장 손쉬운 방법은 “너희들 왜 싸우니” 하면서 머리에 꿀밤을 하나씩 먹이는 것이다. 기자는 그렇게 함으로써 초당파성을 보여줬다고 자위할지도 모르겠지만, 그건 초당파성이 아니다. 국민의 ‘정치 저주’를 부추기는 선동이다. 상식으로 모든 걸 다 해결할 수는 없지만, 상식 수준의 평가와 비판은 꼭 필요하다.
오늘날 한국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정치 저주’에 대해 정치인들은 책임을 통감해야겠지만, 국민과 언론도 공범으로 가담하고 있다는 데 대한 집단적 성찰이 있어야 한다. 옥석(玉石) 구분의 망상은 버리고 ‘도토리 키재기’라는 현실적인 평가방식으로 전환해야 한다. 성실한 개별적 비판에 임해야지 모두를 싸잡아 비판하는 것으론 정치를 바꾸기 어렵다.
전북대 신방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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