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영구 국가정보원장의 사퇴를 권력 주변에서는 국정원의 과거사 진상규명이 궤도에 오른 데 따른 것이라고 설명하는 모양이다. 그러나 국정에 대한 신뢰를 뿌리째 흔든 행담도 사건과 관련, 김재복 행담도개발 사장의 실체를 파악하지 못한 책임을 진 것이라는 설명도 슬며시 흘리고 있다.
이 사건이 온통 거짓으로 드러난 김씨의 대단한 경력에 깜빡 속은 때문이라는 변명을 다 믿지는 않지만, 김씨를 뒷조사한 국정원 책임이 큰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정작 청와대는 그걸 문책한 것은 아니라니, 또 무슨 꿍꿍이 속인가 싶다.
■권력의 속셈을 헤아리기 어려우나 국가최고 정보기관장이 책임질 엄청난 스캔들이란 사실은 부정하면서도 국정쇄신 노력을 보이려는 뜻일 것이다. 청와대 인사수석 등 권력 핵심이 깊이 얽힌 책임을 그렇게나마 분산시키려는 의도도 있을 것이다.
고영구 원장이 국정원 조직을 몰라 겉돌았고 정보공유도 되지 않았다는 얘기도 그런 의도로 흘리는 듯 하다. 어차피 물러날 때가 된 국정원장이 사태를 책임지는 최고급 인사가 됐지만, 그의 책임이 가장 크다고 여기는 국민은 별로 없을 것이다.
■어쨌든 그보다는 공식 사퇴 명분과 진짜 이유 사이에서 기막힌 아이러니를 느낀다. 고 원장이 말대로 과거사 규명은 잘했는지 모르나, 당장 국정에 중차대한 정보업무는 엉터리로 한 사실은 이 정부의 병폐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독일 유명공대 출신에 싱가포르 정부를 대리하는 국제금융 전문가로 행세한 김씨가 지방대 중퇴에 동남아 호텔근무 경력밖에 없다는 사실을 정말 까마득히 몰랐다면, 국정원도 과거사를 뒤지느라 고유 임무는 건성으로 했다고 봐야 마땅할 것이다.
■과거사 규명도 제대로 한 게 아니다. 김형욱 실종사건부터 아무런 물증이 없어 법적으로는 피살 사실조차 확인되지 않았다. 이런 허술한 내용을 서둘러 발표하고는 박정희 대통령이 지시한 증거가 나온 것처럼 떠드는 모습은 솔직히 한심하다. 26년 전 독재 권력과 그를 배신한 정보기관장이 얽힌 비밀공작 의혹은 이제 대단한 미스터리도 아니다.
그보다는 세상 물정을 조금만 알면 쉽게 정체를 간파할 김재복씨 같은 인물에게 권력 핵심과 국가정보기관이 농락 당해 거창한 국책사업을 함께 도모한 사실 또는 그런 변명이 국민에게는 훨씬 개탄스러울 것이다. 국민이 비웃고 깔보는 무능한 정부가 가장 나쁜 정부라는 동서고금의 교훈을 되새기기 바란다.
강병태 논설위원 btk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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