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미(46)의 세 번째 시집 ‘쉬잇, 나의 세컨드는’(2001)은 일상의 중력과 탈주 욕구의 원심력이 그어낸 합력선(合力線)을 궤도 삼아 생활세계 둘레를 불안하게 공전(公轉)한다.
가정주부인 듯한 이 시집 화자들이 “살아가는 힘은 알 수 없는 풍경에의 전율들”(‘없건만 있는 풍경에의--혐오시설’)이어서 그들은 “다른 창 밖 다른 생”(‘그리운 심야’)을 동경하지만, 그들을 둘러싼 섭세(涉世)의 담벼락은 이런 낭만주의적 욕구의 충족을 허락하지 않는다.
시집 화자들에게 도드라진 심리적 윤리적 특질 하나는, 좌절된 욕구가 낳은 원망을 일상의 굴레 쪽으로 쏟기보다 그 굴레를 과감히 벗어 던지지 못하는 제 나약함 쪽으로 쏟는다는 점이다. 그래서 ‘쉬잇, 나의 세컨드는’에는 상처 입은 자아가 휘두르는 자책의 채찍자국이 군데군데 아로새겨져 있다.
화자들의 좌절감은 두 겹이다. 한 겹은 자신이 생활세계에 잘 적응하지 못한다는 느낌과 관련 있고, 또 한 겹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탈주 의지가 이 지긋지긋한 생활세계의 중력권을 벗어나는 데 필요한 임계속도에 이르지 못했다는 느낌과 관련 있다.
일상의 굴레 벗어나지도 동화되지도 못한 채 불안한 공전만…
때론 자책하고… 때론 이번이 아닌 다음이, 변방이 삶의 진실이라고 한발
물러서기도. 아릿한 마음을 정직하게그려도 詩가 아름다울 수 있음을 보여줘
이 화자들은 “이 세상 것 아닌 것 같은 여름 하늘”(‘부엌에 대하여’)로 날아오르지도 못하고, “크리넥스 같은 대화와 햄버거 같은 관계들/ 온갖 빛깔의 질투와 검정 선글라스가 잘 어울리는”(‘대도시는 나의 고향’) 세속에 충분히 동화하지도 못한다. 그것이 그들을 이중의 아웃사이더로, 쌍방향의 마이너리티로 만든다.
생활세계의 감옥에 잘 적응하지도 못하고 거기서 도주하지도 못하는 ‘쉬잇, 나의 세컨드는’의 화자들이 이 난처한 상황의 책임을 옥살이의 가혹함이나 감옥의 견고함이 아니라 제 유약함 쪽으로 돌리는 것에는 일리가 있다.
이 화자들은 과민하다 싶을 만큼 신경이 여리기 때문이다. 그들은 “누가 또 어디서 날 저버리는가보다/ 저녁 산책 수박향인지 자두향인지 싱그러웠는데/ 돌연 또 가슴이 저리다”(‘회귀--비망록’)며 조바심을 내는가 하면, “일부러 폐 끼칠 마음은 아니었다 진정”(‘고갱--<일본 판화가 있는 정물> ’)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닐 만큼 남들의 마음에 마음을 쓴다. 일본>
화자들의 이런 마음 씀은 윤리의 수준에서 염치나 배려 같은 긍정적 맥락에 배치될 수도 있겠지만, 사회심리학 수준에서는 대중사회의 지배적 성격유형인 타인지향형(외부지향형)의 맥락에 배치될 수도 있다.
타인지향형이라는 말을 유명하게 만든 ‘고독한 군중’의 저자 데이비드 리스먼은 이 유형의 심리적 장치를 레이더에 비유했다. 이들의 사회적 지능은 그 레이더를 통해 타인의 마음을 탐지하는 데 탕진된다.
‘쉬잇, 나의 세컨드는’의 화자들도 마찬가지다. 늘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는 듯한 그들에게 정작 중요한 것은, 얄궂게도, 제 눈길과 마음이 아니라 타인의 눈길과 마음이다. 이 여성화자들은 독립을 갈망하지만, 독립을 갈구하는 그 내면조차 독립적이지 못하다. 그들은 이 찢김 속에서 좌절한다.
그러나 이런 레이더의 심리 속에서 좌절이 누적되고 그 좌절이 늘 제 탓으로 여겨질 때, 자아가 그 압력을 견뎌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죽거나 미치지 않기 위해선, 어떤 방어기제가 필요하다. ‘쉬잇, 나의 세컨드는’의 화자들이 고른 방어기제는 대체로 합리화의 영역에 속한다. 그들은 크게 세 개의 방책으로 자신을 방어한다.
첫째 방책은 자신을 짐짓 ‘세컨드’로 규정함으로써 자아와 세계의 관계를 헐겁게 만드는 것이다. 그 헐거움이 낳은 거리는 자아에게 자유를 건네고 책임을 덜어준다.
그래서 이 시집의 한 화자는 “누구를 만나든 나는 그들의 세컨드다/ ,라고 생각하고자”하고, “삶이 본처인 양 목 졸라도 결코 목숨 놓지 말 것/ 일상더러 자고 가라고 애원하지 말 것”(‘나는야 세컨드 1’)을 다짐한다. 여기서 세컨드는 “강변의 모텔의 주차장 같은/ 숨겨놓은 우윳빛 살결의 세컨드”가 아니라 “이번,이 아니라 늘 다음,인/ 언제나 나중,인 홍길동 같은 서자,인 변방,인/ 부적합,인 그러니까 결국 꼴찌”를 가리키는데, 화자는 바로 그 세컨드 속에 “진실의 아름다움, 그리움의 흡반, 생의 뇌관”(‘나는야 세컨드1’)이 자리잡고 있다고 말한다.
이번이 아니라 늘 다음인 ‘세컨드’ 속에(다시 말해 여기가 아니라 저기에!) 진실의 아름다움과 그리움의 흡반이 있다는 인식은 ‘나의 서역--비망록’이라는 쓰리고 아름다운 시를 낳는다.
시인이 “서로 편지나 보내자 삶이여/ 실물은 전부 헛된 것/ 만나지 않는 동안만 우리는 비단 감촉처럼 사랑한다 사랑한다 죽도록/ 만날수록 동백꽃처럼 쉽게 져버리는 길들/ 실걋?없다 아무 곳에도/ 가끔 편지나 보내어라”라고 쓸 때, 그의 자아가 수행한 합리화의 방어기제는 독자를 어떤 불교적 깨달음의 경지로까지 실어 나른다.
시인이 구도(求道)를 꾀하느라 합리화를 실천한 것은 아니겠으나, 모든 간절한 사랑은 부재의 사랑이라는 이 시의 전언이 ‘세컨드’ 동아리 안의 특수한 진리만도 아닐 것이다. 아무렇거나 이들 세컨드에게 중요한 것은 대상과의 거리다.
시집의 또 다른 화자는 “멀리 있어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들/ 상처가 되지 않는 거리/ 라벤더와 제라늄 식의 먼 명칭들”(‘헤비메탈을 들으며’)만을 가까이 한다. 요컨대 그들은 좌절하지 않기 위해서 밀착을 삼간다. 상석을, ‘퍼스트’의 자리를 사양한다.
방어의 둘째 방식은 좌절 자체에 신비의 베일을 두르는 것이다. 예컨대 한 화자는 “나는 좌절하는 자세가 좋다/ 바닥에 이마를 대고/ 유리창처럼 투명하게/ 뿌리의 세계를 들여다본 것들/ 마치 하늘에 엎드려 굽어 내려보는 신 같은”(‘나는 좌절하는 것들이 좋다’)이라고 말한다.
이 구절들은 미국 흑인해방운동가들이 채택한 “검은 것이 아름답다”는 표어를 연상시킨다. 검은 피부를 다른 빛깔로 바꿀 수 없을 바에야 최선의 방책은 그 빛깔을 사랑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좌절이 피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최선의 방책은 그 좌절마저 청안시하는 것이다.
이 두 번째 방책 뒤에 어른거리는, 좌절은 피할 수 없는 것이라는 인식이 세 번째 방책을 낳았다. 그것은 일종의 결정론을, 더 나아가서 숙명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시집의 한 화자는 “수저에만 부딪혀도 금세 파랗게 멍이 들”(‘부엌에 대하여’) 정도로 생활세계에 적응을 못 하지만, 그것이 ‘근원적으로는’ 그 자신의 잘못인지 확실치 않다. 왜냐하면 그는 “그런 체질이 있어요.
부엌에 가면 유난히 넘어지고/ 다치는. 하염없이 창을 내다보다 냄비나 태우는”(‘부엌에 대하여’) 체질이기 때문이다. 그가 생활세계에 동화하지 못하는 것은 그가 그렇게 ‘태어났기’ 때문이다.
‘임계량--마이크로라이프’라는 새뜻한 시는 이런 결정론 또는 숙명론과의 어질어질한 놀이다. 시인이 “나 알고 싶은 것은, 우유가 물컹 젤리로 상하는 그 순간/ 벽시계와 건전지가 마지막 떨림을 끝내는/ 유리가 자신을 깨기로 하는/ 달리던 공이 멈추기로 하는 그 결정의 순간의 까닭과 표정/ 사랑과 그리움의 그러한 마지막 포화와 소진의 순간/ 꼭 그 한순간 그 한 경계/ 그 전복의 꼭 한 지점, 그 찰나의 모든 것/ 퇴적이 퇴적을 벗어나는 그 폭발의 한 점// 그 옮아가는 변질의 한 순식간의 세계가 항상 궁금할 뿐이지/ 거기 가면 다 있을 테니 썩은 나뭇잎과/ 발아하는 구름의 관계가 하늘 너머와 이곳에서의 삶의 이치와/ 내가 다른 사람이 되지 않은 그 어떤/ 한 출생에의 결정적인 이유와 까닭이”라고 노래할 때, 독자의 가슴은 역사와 자연을 가로지르는 양질전화(量質轉化)의 장엄한 풍경 앞에서, 세상을 예측불가능한 것으로 만드는 초기조건의 중대함 앞에서 숙연히 울렁인다.
‘쉬잇, 나의 세컨드는’은 지난 주의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와 판이한 외양을 지녔지만, 그 내면 공간은 사뭇 닮았다. 이 시집에서든 저 시집에서든 상처투성이 화자들은 뭔가에 괴로워하며 제 존재에 갇혀있고, 대체로 타인지향적이고, 그들의 자책 속에는 자기애가 웅크리고 있다.
그러나 마흔 앞뒤의 김경미를 대변하는 화자들은 서른 앞뒤의 황지우를 대변하는 화자들보다 제 내면을 들여다보는 시선이 한결 더 정직하다.
그들은 자신이 자신 안에 갇혀있음을 선선히 인정한다. 아릿한 마음을 곧이곧대로 그려도 시가 될 수 있음을, 세계로 활짝 열리지 않아도 시가 아름다울 수 있음을 ‘쉬잇, 나의 세컨드는’은 적막하게 보여준다.
▲ 고갱--<일본 판화가 있는 정물>일본>
날 좀 더 과묵하게 묘사해다오 슬픔이여
무모함이
파멸이 서리지 않는 생을
그 어떤 진실로
사랑하랴
강렬하지만 고요한 법을 나 깨우쳤던가
보랏빛 옷자락,
노란 붓을 든 나비들 가득한 세상에
자주 검정 윤곽 끼워 넣고
탁자 위 이마 잘린 머리통에 꽃을 꽂고
일부러 폐 끼칠 마음은 아니었다 진정
객원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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