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佛 EU헌법 부결 파장
유럽 통합의 ‘로드맵’이 뿌리째 흔들리고 있다. 1952년 유럽석탄철강공동체(ECSC) 창설 이후 경제블록화에 성공한 유럽이 유럽헌법을 통해 정치적 통합까지 추진했지만 프랑스의 비준 부결로 치명타를 입었다. 정치 통합의 제동뿐만 아니라 유로권 확대도 당분간 차질이 불가피할 전망이어서 유럽 통합의 꿈이 산산조각날 위기에 처했다.
프랑스의 EU헌법 부결은 유럽 정치통합에 대한 회의론으로 확대될 전망이다. EU 창설 및 헌법 제정을 주도한 프랑스는 사실상 유럽의 여론을 이끄는 ‘정치적 수도’ 역할을 하고 있어 다음달 1일 치러지는 네덜란드 국민투표 등 다른 회원국들의 비준 과정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된다.
네덜란드마저 프랑스의 전례를 따른다면 ‘부결 도미노’ 현상은 걷잡을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비준 반대 국가가 늘어난 상황에서 EU헌법을 수정할 경우 회원국들이 자국의 이익만을 내세우며 EU의 분열이 가속화, 공중분해할 수도 있다.
EU의 동진 정책도 차질이 우려된다. 지난해 5월 동유럽 10개국이 대거 가입한 이래 일자리 상실 등을 우려해온 서유럽 회원국들의 불안감이 프랑스 유권자들을 통해 실제로 표출됐기 때문이다.
불가리아와 루마니아는 2007년 가입 일정이 확정돼 있고 우크라이나는 가입 자격을 논의하고 있다. 독일 집권 사회민주당 소속인 클라우스 보베라이트 베를린 시장은 “이번 부결은 유럽통합과 관련해 완벽한 퇴보”라고 평가했다.
특히 반대 여론이 60%에 육박하는 네덜란드는 지난해 종교분쟁을 일으킨 이슬람 국가 터키의 가입을 극도로 꺼리고 있어 올 10월부터 시작되는 터키의 EU 가입 협상에 난항이 예상된다.
압둘라 굴 터키 외무장관은 “터키의 가입협상이 프랑스의 부결로 영향을 받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유럽 경제에도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유로화 확대가 차질을 빚고 유럽경제가 통합의 시너지효과 없이 스태그플레이션(경제불황 속 물가상승)에 직면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미국과 중국, 인도 등 신흥 개발도상국들에 밀리고 있는 상황에서 유럽통합의 미래마저 불투명해지면서 신규 가입국들이 자국 통화를 포기하고 유로화를 채택하는 모험을 선택하지 않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유로화도 1.25달러까지 하락하는 등 약세가 지속될 전망이다. 폴란드 등 동유럽 회원국들은 가입 이후 예상보다 자국의 경제가 좋아지지 않았다며 볼멘소리를 내고 있다.
한편 EU헌법 반대여론이 높은 영국은 내년 초 국민투표에서 부결 되더라도 유럽통합을 깼다는 비난을 프랑스에 떠넘길 수 있게 돼 정치적으로 최대의 수혜자로 떠올랐다.
고성호 기자 sungho@hk.co.kr
■ 향후 일정
프랑스의 비준 부결이 곧바로 유럽연합(EU) 헌법에 대한 정치적 사망을 의미하진 않는다. EU의 정치적 통합을 위한 EU 헌법 제4조는 “25개 회원국 모두의 비준을 받아야 발효된다”고 규정하고 있지만 예외적인 상황에 대비한 부속합의서를 두고 있다.
부속 합의서는 “2년 뒤(2006년 10월)까지 회원국 5분의 4(20개국)가 비준하고, 1개 또는 그 이상의 국가에서 헌법이 부결되면 이 문제를 유럽이사회(정상회의)에서 논의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정상회의에선 부결국가가 소수이면 해당국가를 상대로 재투표를 실시하거나 헌법 문제조항을 수정할 수 있다.
전문가들은 재투표보다는 쟁점사안에 대한 헌법수정 및 EU 의사결정 체제의 변화 가능성을 더 높이 보고 있다. 물론 부결국가가 다수이고, EU 주축국일 경우는 상황이 달라져 재투표가 어려워진다. 이 경우 유럽헌법은 소멸되고 헌법 없는 EU는 분열로 치닫게 돼 경제통합마저 흔들릴 수 있다.
향후 EU가 어떤 선택을 할지는 다음달 1일 네덜란드 투표와 6월 16~17일 정례 유럽정상회의가 분수령이 될 전망이다. 네덜란드에서 부결되면 유럽 정치통합에 대한 회의감이 퍼져 ‘반대 도미노 현상’이 나타날 우려가 있다. 다만 최악의 시나리오보다는 유럽의 정치적 통합이 당분간 표류할 것이란 분석이 아직 우세하다. 정상회의에선 유럽통합의 속도조절과 반대여론 무마를 위한 타협안 등이 심도있게 다뤄질 전망이다.
EU 회원국들의 비준 절차는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네덜란드 영국 등 비준절차를 남겨둔 국가는 물론 EU 지도자들도 “EU 헌법은 죽지 않았다”며 절차진행을 강조하고 있다. EU 헌법은 현재까지 25개 회원국 가운데 10개국에서 비준절차가 진행됐으며, 독일 등 9개국은 승인했다.
이태규 기자 tglee@hk.co.kr
■ "유럽만 있고 佛은 없다" 우려 탓
프랑스인이 EU 헌법을 반대한 이유는 ‘유럽이 하나가 되면 프랑스가 사라질 것’이라는 걱정으로 요약된다. 이 같은 정서에 현 정부에 대한 불만이 기름을 끼얹은 꼴이 됐다.
자크 시라크 정부는 10%대의 높은 실업률 등 경제문제로 국민반발을 샀다. 경제개발협력기구(OECD)에 따르면, 올해 프랑스의 경제성장률은 1.42%인 반면 영국은 2.41%, 미국은 3.61%에 달한다. 시라크 대통령은 투표를 앞두고 장 피에르 라파앵 총리의 교체 의사까지 밝혔지만, 국민은 외면했다.
하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프랑스의 위상과 일자리를 위협할 것이란 위기감이 작용했다. EU의 통합은 정치ㆍ경제적으로 프랑스에 실익이 없다는 것이다. 새 헌법이 그린 단일유럽의 청사진에서 프랑스의 위상은 독일과 영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위축된 게 사실이다. 이에 따르면 유럽 최대 인구국인 독일은 가장 많은 표결권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통합은 프랑스가 주도하고 정치주도권은 독일이 행사할 것이라는 심리가 유권자, 특히 우파 진영에서 팽배했다. 우파는 “프랑스가 EU에 너무 많은 주권을 양보했다”고 비난해왔다.
노조 등 좌파는 경제적으로 영국식 ‘앵글로색슨 자본주의(신자유주의)’에 휩쓸리는 것을 두려워했다. 독일 이탈리아까지 경제침체에 시달리는 상황에서 ‘영국식 모델’은 EU 내부의 ‘체제경쟁’에서 사실상 승리했다. 영국경제는 프랑스인 25만명을 고용할 만큼 상대적 우위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프랑스인들은 규제철폐, 노동의 유연성, 자본개방을 내용으로 한 ‘신자유주의 개혁’이 정체성을 파괴하고 행복을 앗아갈 것이라고 여기고 있다. 유럽의 전통적인 사회보장을 포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좌파진영에선 “EU헌법이 거대 시장경제를 창출해 프랑스의 복지 수준을 저하시킬 것”이라고 주장해왔다.
한편으론 EU확대로 이질적 요소가 들어오는 것에 대한 거부감도 섞여 있다는 분석이다. EU가 동유럽과 이슬람국가로 확대되면 저임금 국가들에 일자리를 빼앗길 것이라는 우려다. 프랑스 여론은 1년 전 동유럽권 10개국이 무더기로 EU에 가입한 이후 급속히 악화했다. 프랑스는 특히 터키와의 EU가입 협상을 껄끄럽게 여겨왔다.
이태규 기자 tglee@hk.co.kr
■ 시라크 정부 '벼랑'
EU헌법 부결로 프랑스 정치권은 커다란 소용돌이에 빠졌다. 헌법 통과에 정치생명을 걸다시피 했던 자크 시라크 대통령과 그가 이끄는 중도우파 정부는 벼랑에 몰렸다. 대통령 취임 10년 만에 최대 위기를 맞은 시라크 대통령은 당장 다음 번 대선 출마부터가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대신 니콜라 사르코지(48) 재무장관이 집권 중도우파연합(UMP)를 이끌 차기 주자로 떠오르고 있다. 우파 내 강경파로 꼽히는 사르코지는 범죄와의 전쟁을 강하게 밀어붙여 범죄율을 크게 떨어뜨리면서 최고 인기 정치인으로 떠올랐다.
내각 개편도 뒤따를 전망이다. 장 피에르 라파랭 총리의 경질은 확실시된다. 후임 총리로는 시라크 대통령의 측근인 도미니크 드 빌팽 내무장관과 미셸 알리오-마리 국방장관 등이 하마평에 오르고 있다.
EU 헌법 반대에 앞장섰던 극우ㆍ극좌파는 이번 부결로 상당한 정치적 입지를 다지게 됐다. 2003년 대선에서 시라크에 패했던 극우정당 국민전선(FN)의 장 마리 르펜 당수는 “시라크 대통령이 도박을 원했지만 그는 패배했다”며 시라크의 사퇴를 촉구했다. 반면 헌법 통과를 놓고 찬반 진영으로 갈라졌던 제1야당 사회당은 여당 못지 않게 심각한 후유증을 겪을 것으로 보인다.
박상준기자 buttonp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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