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몇 시간씩 책을 보는 것이 습관이 되어 하루라도 책을 보지 않으면 일을 하지 않는 느낌이다. 그래서 35년간 공직생활을 하면서 책가방을 늘 가지고 다녔다. 그 가방이 떨어져서 기념으로 보관해 두었으나 집사람이 어느 날 그것을 치워버렸다. 지인들은 지금도 그 가방을 가지고 다니는지 물어본다. 그 때 그 가방은 아니지만 여전히 나는 책가방을 가지고 다닌다.
공부를 계속하게 된 배경에는 몇 가지 사연이 있다.
초등학교 다닐 때는 동네 개구쟁이였다. 학교 갔다 오면 마당에서 책가방을 마루에 던지고는 친구들과 노는 데 바빴다. 초등학교 6학년이 되자 중학교 진학시험을 치러야 한다고 해서 마지못해 공부를 시작했다. 당시 담임선생님이 학생들을 늦게까지 잡아두고 공부를 시켰다. 때로는 코피를 흘리면서 6년 공부를 1년에 다 마치듯이 늦게까지 공부했다.
당시 중학교 진학 시험은 처음 치른 국가고시였다. 시험을 칠 때 객관식 시험문제에 대한 요령이 없어 천천히 문제를 풀다 보니 3분의 2 정도 풀었는데 종이 울렸다. 답안지를 내면서 시험에 떨어지겠구나 포기하고 있었다. 정작 성적이 나왔는데 보니 우리학교 진학생 중에 1등이었다. 덕분에 중학교에 입학한 후 반장이 되었다. 그 때부터 뒤떨어지지 않으려고 개구쟁이 생활을 완전히 청산하고 공부에 전념했다.
또 하나는 할머님 덕분이다. 어릴 적에 부모님은 타지에서 어업을 하셔서 조부모님과 함께 살았는데 할아버지께서 선비로 일을 하지 아니하므로 할머님께서 농사일을 맡아서 했다. 죽을 때까지 일만 하시다가 돌아가신 할머님을 보고 할머님처럼 죽을 때까지 한 가지는 열심히 하겠다고 선택한 것이 공부였다.
어려서 읽은 에세이도 영향을 미쳤다. 그 에세이 내용은 “마른 논에 물을 대면 싹이 돋아나고 계속 물을 대면 나무가 자라서 큰 나무가 된다. 그래도 계속 물을 대면 나무는 더 커서 열매를 맺고 그늘이 져서 쓸모가 있다. 사람도 계속해서 머리에 물을 대면 사회에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 에세이를 보고는 나도 머리에 물을 대듯 책을 가까이 하겠다고 마음 먹었다. 공부하는 습관이 드니 평생을 떠나지 않았다.
1964년부터 공직(처음에는 부산시, 이후 서울시)에서 일하게 되었다. 하위직으로 있을 때는 그저 시키는 대로 일만 하고 시간 나면 좋아하는 타임지 커버스토리나 읽으면서 세계 돌아가는 데에만 관심을 가졌다. 그러다가 관리직이 되면서 제대로 일을 해야 되기 때문에 지식이 필요했다.
대학 공부를 하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그리고 이왕이면 영어공부를 겸해서 미국의 대학을 다녀야겠다는 생각으로 통신강의를 신청했다. 먼저 1978년에 미국 콜롬비아 퍼시픽 대학의 경영학과에 등록하여 공부를 시작했다. 지금처럼 인터넷이 구비되어 있지 않을 때라 통신대학은 강의록이나 시험지도 우편으로 받아서 역시 우편으로 답안지를 보내야 했다. 82년에 대학을 졸업하고는 다시 유타 주립대 경영학과에 등록을 해서 5년을 더 공부했으나 아직 졸업을 하지 못했다. 대학공부를 하니 더욱 폭 넓게 사회를 이해할 수 있었다.
공부는 학교에서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서울시에서 과장과 국장이 되면서 각종 행정, 경영, 경제에 관한 자료를 접하는 기회가 많았다. 계속 머리에 지나간 자료들이 축적되어 정책을 수립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94년 당시 삼성경제연구소 소장이 고등학교 동창이었는데 CEO 정보지를 매주 보내주었다. 친구가 보낸 자료이기 때문에 귀중히 생각하고 읽고 보관했다. 또한 외국 석학이 쓴 책이나 자료도 꾸준히 읽었다. 행정에 도움이 컸다.
97년 4월경 시청 간부회의에서 외환위기를 미리 이야기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렇게 살아 있는 자료를 꾸준히 읽었던 덕분이다. 외환보유액이 급격히 줄어든다는 것은 나와 같은 자료를 읽은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외환위기가 올 징조라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외국 자료를 읽으니 세계 벤처사업의 발전과정을 이해하고 시장에게 정책을 건의할 수도 있었다. 각종 자료를 통해서 공부한 결과로는 국가 업무의 효율성을 위하여 민간 주도국가로 변해 나가야 하고 기업의 창의력을 키우기 위하여 보다 기업에 자유로운 활동이 보장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되었다.
98년 정년을 1년 앞두고 제 2의 인생을 위해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우선 전문대에서 골프를 공부했다. 골프강사 자격증도 땄다. 취미로 시작한 골프이지만 체계적인 공부를 하니 더욱 재미있었다. 연세대 행정대학원에서는 도시행정학을 공부했고 내처 서경대 영문과에도 편입학했다. 그 전까지는 경영학이나 행정학 같은 실용학문을 했는데 영문학을 하니까 또 달랐다. 문ㆍ사ㆍ철(文思哲)의 공부를 통하여 나름대로 자아를 그릴 수 있었다. 특히 영문학을 하면서 너대니얼 호손을 배우게 된 것은 내 인생에 큰 선물이다. 그는 인간이 부모와 친구, 동창, 동료 또는 이웃사람들과 보이지 않는 고리로 연결되어 있다고 보고 한 사람이 반윤리적이거나 비도덕적일 때는 이 고리가 끊어져 불행하게 산다는 ‘인간성의 고리(chain of humanity)’ 이론을 내세웠다. 그런 바탕에서 쓴 것이 ‘주홍글씨’이다. 이것을 알고 나니 자아란 외부 생활을 위하여 갖추어야 할 지식과 인격, 무한한 에너지를 발산하는 내면의 감성, 우주 속에 무한히 진화하는 영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어 경영에도 대입해서 쓰고 나 스스로도 자아성숙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공사를 맡아 몇 가지 경영 원칙을 세울 수 있었던 것도 모두 꾸준한 공부 덕분이다. 나부터도 공부로 새로운 것을 깨쳤기에 나는 지식경영을 강조한다. 지식이 자본인 시대를 맞아 지식근로자를 양성하기 위해 직원들한테 공부하는 기회를 아낌없이 주려고 한다. 석ㆍ박사 과정에 들어가면 등록금을 지원하고 기술영어와 원어민 영어회화를 가르친다. 미국에서 기술분야에는 학문의 트렌드가 1년 6개월마다 변하기 때문에 신기술에 대한 사이버교육 시스템을 구축했다. 가르치는 만큼 직원들의 기술혁신이 크게 늘어나 쓸데없이 들어가는 비용이 줄어든다.
둘째, 감성경영이다. 인간은 이성보다는 감성에 호소해야 변할 수 있고 또한 법의 실효성이 지도자의 솔선수범에 의하여 확보된다는 법철학자의 이론에 따라 관리자의 솔선수범으로 직원들이 보고 스스로 변해 가도록 하고 있다.
세번째로 윤리경영을 내세우는 것은 앞서 말한 호손의 철학에서 배운 것이다. 기업도 고객과의 관계에서 고리가 끊어지지 않도록 소방안전, 안전운행 등을 강조해 기업윤리를 높이고 있다.
넷째, 지혜경영은 직원들이 잠재력을 발휘하도록 인센티브 제도를 확대했다. 직원들 개개인의 긍정적인 면을 높이 평가하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 못한다는 마음의 벽을 제거하도록 하고 있다. 또한 근무하면서 미래학에 대한 공부를 계속하여 공사의 장래 비전을 수립할 수 있었다. 요즘도 외국의 원서를 열심히 들여다보면서 세계 추세에 발맞추려고 애쓰고 있다.
앞으로 21세기는 20세기 생각과 경영전략으로는 경쟁할 수 없다는 것이 미래학자들의 이야기다. 얼마 전까지도 기업을 구할 최상의 전략인 양 떠받들여졌던 다운사이징, 벤치마킹, 리엔지니어링 등은 이미 모든 기업이 다하고 있기 때문에 똑같은 전략을 가지고 타기업과 경쟁할 수 없다. 무엇이 될지는 몰라도 새로운 전략을 스스로 만들어가야 할 시점에 이른 것이다. 새로운 전략을 만들려면,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려면 역시 세상을 똑바로 보아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공부를 하는 수 밖에 없다.
공부를 하면 할수록 부족하다고 느껴진다. 그래서 오늘도 아침 7시에 영어학원에서 1시간 강의를 듣고서야 출근을 한다. 벌써 5년째 계속하고 있지만 만족스럽지 못하다.
■ 제타룡 사장은
1938년 일본 오사카(大阪)에서 출생했다. 6세 때 경남 사천의 고향으로 돌아와 그 곳에서 진주고등학교를 졸업했다. 64년에 9급 공무원으로 들어가 서울시 교통국장, 감사관 등을 지낸 입지전적인 인물.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젊어서 못한 공부를 공무원 생활을 하면서 시작, 공직 중에 미국의 대학 2곳을 다녔고 퇴직을 준비하며 한국의 대학원 1곳과 전문대 1곳을, 퇴직 후에 대학 1곳을 더 다녔다. 그가 97년 4월 서울시 간부회의에서 외환대란이 올 것이라고 예측한 것은 유명한 일화다. 그는 현재의 우리나라 경제에 대해서는 산업의 시스템이 튼튼해서 과거와 같은 위기는 없겠지만 제조업 자체의 인구가 줄고 있기 때문에 서비스산업을 늘려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2002년부터 서울시도시철도공사 사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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