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은 올해 연두 기자회견에서 한국 경제의 가장 큰 문제를 사회적 양극화라고 지적하며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동반성장이라는 나름의 처방을 제시한 바 있다.
이는 ‘윗목과 보일러’라는 칼럼(1월 18일자)에서 지적했듯이 진단은 맞지만 처방은 잘못된 것이다. 양극화의 원인인 시장 만능의 신자유주의 정책을 유지하는 한 사회적 양극화는 계속될 수밖에 없는데 노 대통령은 이 같은 근본적인 문제를 회피했다.
그런데 우려했던 대로 최근의 정부 발표에 따르면 양극화에 대한 노 대통령의 문제의식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의 빈부 격차는 올 1ㆍ4분기 중 최상류층의 수입이 최하류층의 18배로 벌어지는 등 계속 심화되고 있다. 특히 양극화 현상은 교육비 지출에서 가장 두드러져 빈곤과 계급의 세습화가 우려되고 있다.
그러나 정작 주목할 것은 경제 정책을 책임지는 최고사령관 중의 한 명인 한국은행 총재가 이 문제에 대해 “선진국으로 갈수록 빈부 격차가 줄어들게 되어 있다”면서 “국내에 최근 빈부 격차가 커지고 있는 것은 선진국으로 가는 과정에서 일시적인 것”이라는 낙관론을 펴고 나선 것이다.
박 승 총재는 지난 주 한 고등학교에서 세계화와 신자유주의가 불가피한 추세라는 특강을 하면서 양극화를 우려하는 질문에 이같이 답한 것으로 언론은 전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 사회의 양극화를 걱정하고 있는 마당에 양극화가 선진국으로 가는 과도기적 현상일 뿐이라니 한 시름 놓을 수도 있다. 그러나 전혀 그런 것 같지 않다.
오히려 경제 정책을 책임지는 중앙은행장이 어떻게 이처럼 무지하고 무책임한 발언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충격에 휩싸이게 된다. 간단히 통계를 보면 알 수 있다.
우리가 사회적 양극화를 측정할 때 사용하는 대표적인 것이 지니(GINI)계수인데 이 수치가 1에 가까울수록 양극화가 심하다는 이야기다.
이 지니계수를 국제 기준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방식으로 산출해 미국, 영국, 한국을 비교하면 ‘IMF(국제통화기금) 위기’ 직전인 1996년을 기준으로 각각 0.368, 0.344, 0.298을 기록하고 있다.
이처럼 IMF 위기 극복을 위해 김대중 정부가 미국식 신자유주의 정책을 도입하기 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는 사회복지의 천국인 북구 국가들보다는 못하지만 우리보다 훨씬 선진국인 미국, 영국보다는 빈부 격차가 크지 않았다.
한마디로, 선진국일수록 빈부 격차가 적은 것이 결코 아니다. 주목해야 하는 또 다른 추세는 빈부 격차가 1980년대 이후에도 별로 악화되지 않은 북구와 달리 80년대 들어 신자유주의 정책을 펴온 미국과 영국의 경우 빈부 격차가 심각하게 악화되어 오고 있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87년 미국과 영국의 지니계수는 각각 0.335와 0.303으로 10년 뒤인 96년보다 0.033, 0.041포인트나 낮았다. 미국과 영국은 선진화될수록 빈부 격차가 오히려 심화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김대중 정부가 신자유주의 정책을 편 이후 빈부 격차는 날로 심해져 2000년 현재 지니계수가 0.358로 높아졌다.
우리의 빈부 격차가 선진국 중 두 번째로 빈부 격차가 심한 영국을 이미 제쳤고 가장 빈부 격차가 심한 미국을 거의 추격했다는 반갑지 않은 이야기이다. 이처럼 빈부 격차는 선진국으로 갈수록 줄어드는 것이 아니며 최근의 양극화가 선진화의 과도기적인 현상도 아니다. 그리고 이는 새로운 사실이 아니라 공공연히 지적되어 온 문제이다.
문제는 이처럼 자명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박 총재가 엉뚱한 주장으로 청소년들을 호도한 이유이다. 그가 경제 지식이 모자라 그런 것이라면 우리의 경제정책이 걱정스럽다. 그것이 아니라 알면서도 현실을 미화하기 위해 그런 것이라면 전형적인 곡학아세로 무지 못지않게 심각한 문제이다.
서강대 정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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