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갓지면서도 치열한 정신. 취미 삼아 옛글과 그림을 찾아 읽고 음미하는 행위를 굳이 요약하라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까. 고전 읽기는 언뜻 호사가의 여유처럼 보이지만, 선인의 높은 예술적 성취와 시대정신을 생활사와 곁들여 독해하는 지난한 작업이다. 우리 한시와 그림에 대한 감상과 해설을 담은 책 두 권이 나란히 선보였다. 흔하다면 흔할지 모를 이 책들을 특별히 주목하는 건 거의 전적으로 한양대 정민 교수와 언론인 이상국씨의 담박하면서도 재기 넘치는 문장 때문이다.
김범수기자 bskim@hk.co.kr
■ 꽃들의 웃음판
정민 지음ㆍ김점선 그림
사계절 발행ㆍ1만5,000원
고려 말 정몽주 일파로 몰려 귀양길에 오른 문신 이첨(李詹)은 잠시 경국제세(經國濟世)의 꿈을 접었다. ‘평생에 품은 바람이 이미 다 글렀으니/ 게으름 열 배 더함 어이하지 못하겠네/ 꽃 그늘 돌아들어 낮잠에서 깨어나/ 어린 아들 손을 잡고 새 연꽃을 보노라’ 그때 지은 ‘용심(慵甚)’이라는 시는 한시 속의 사계절 시정(詩情)을 풀어낸 ‘꽃들의 웃음판’에서 봄의 마지막 절에 배치되었다. 딱 이맘이다.
그런데 ‘자적(自適)’이라는 다른 시를 곁들여 소개한 이 절에 ‘게으름에 대하여’라는 제목이 붙었다. 본성이 게으른 사람의 글이라는 뜻이 아니다. 모름지기 인생을 게으르게 살아라는 것도 아니다. 뜻이 꺾여 시골에 숨어 사는 선비에게 남은 것은 게으름뿐이라는 것이요, 게으름 속에서 ‘꽃 그늘’에 안기고 ‘새 연꽃’도 보고, 봄물 가득한 방죽도 즐긴다는 뜻이다.
정민 교수는 봄 여름 가울 겨울 무심한 듯 흘러가는 사철의 변화를 우리 선조들이 어떻게 바라보고 음미했는지, 그 속에서 어떤 삶의 환희와 비애를 느꼈는지를 모두 120여 편에 이르는 한시를 통해 보여준다. 시들을 사계절로 가르고 철마다 10여 가지 주제를 잡아 적절하게 배치한 뒤, 잘 알려진 글솜씨로 우리말 운율을 살려 번역하고 시에 얽힌 선인의 성정(性情)과 사연을 들려준다.
‘시골 마을 풍경이 날로 꽃다워지니’ 봄날은 역시 꽃잔치 일색이다. 여름은 더위와 여유. ‘시냇가 띠집에 한가롭게 홀로 살아/ 밝은 달 맑은 바람 흥취가 넉넉하다/…/ 대숲으로 상을 옮겨 누워 책을 읽는다’. 가을을 감싸는 정서는 낙엽과 님이며 벗 생각이다. 겨울에는 눈 덮인 산 빛이 청렴강직하게 반짝인다. 한시만 풀어놓은 게 아니고 글 중간에 미당의 시집이며 한용운과 황지우의 시구도 등장한다. 편안한 책이다. 저자가 자신의 책에 싣기를 고대했다는 화가 김점선씨의 그림은 참신하지만 글쎄, 썩 잘 어울리는 것 같지는 않다.
■ 옛공부의 즐거움
이상국 지음
웅진지식하우스 발행ㆍ1만1,000원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이 뭐라고 생각하는가’고 물어놓고 자답한다 ‘난 가끔은 책이라고 생각한다. 책 중에서도 채근담’. 김정희의 ‘세한도’에 반해 추사 고택을 순례지처럼 다닌다는 저자는 ‘채근담’의 ‘죽영소계진부동 월륜천소수무흔(竹影掃階塵不動 月輪穿沼水無痕)’(32장)을 불러낸다.
‘대숲 그림자에서 빗자루를 상상해낸 것도 아름답지만, 그것이 밤새 쓸어내기를 거듭해도 다만 그림자일 뿐이니 티끌 하나 건드리지 않는다는 것도 묘하고 아득하다.’ 허(虛)의 경지니, 무위(無爲)의 정신이니 하면서 고덕(古德)에 감탄하는 저자는 거기서 문득 황지우의 시 ‘그리움’을 떠올린다. ‘대밭 그림자가 마당을 빗질한다/ 티끌을 쓸어가는 바람’ 채근담에 가탁한 듯하지만 이 시는 실은 채근담과 정반대의 정서를 표출하고 있다. 위(爲)다. 하지만 그는 황지우의 시 속에서 ‘절망 속에서 돋아나는 건강하고 깨끗한 의욕 같은 것’을 발견했다. 그래서 채근담을 뒤집어놔도 그리 속되지 않고 결 또한 곱다는 것이다.
‘옛공부의 즐거움’은 옛글과 옛그림, 나아가 옛사람의 삶에 취해 살아가는 고전애호가의 감상문집이다. ‘몽유도원도’에 숨어 있는 안평대군과 박팽년, 최항, 신숙주의 엇갈리 운명, 신잠의 ‘탐매도’와 김홍도의 ‘주상관매도’, 김정희의 ‘부이작란’, 조희룡의 ‘사군자’를 비롯해 청대 화가 팔대산인, 정섭, 소치 허유의 인생과 그림에 대한 평에다 시쳇말로 ‘필’ 받은 노자와 논어, 금강경의 구절구절을 만날 수 있다.
저자는 어렵고 딱딱하게 느끼기 쉬운 우리 옛글과 그림을 쉽게 편안하게 감상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고전을 과거의 틀 속에 가두어 놓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체험과 사회 현상에 적절하게 결합해 현재로 불러내는 발랄한 온고지신의 작업이다. 머리말에서 넘치는 재기를 슬쩍 보여주면서도 본문에서 절대 ‘오버’하지 않는 차분한 심미안이 돋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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