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정부의 대(對) 일본 불쾌지수가 위험 수위로 치닫고 있다. 역사 왜곡, 독도 영유권 주장 때문이 결코 아니다. 일본이 북핵 문제에서 한국에 딴지를 걸고, 한미동맹의 조정기를 틈타 한미관계를 벌리면서 미일동맹의 중요성을 부각하는 얄팍한 행동을 서슴지않기 때문이다.
한국 당국자들의 분노가 표면화한 계기는 야치 쇼타로(谷內正太郞) 일본 외무성 사무차관의 발언. 야치 차관은 11일 방일한 유재건 의원 등 국방위원들에게 “북핵 문제에서 미국과 일본은 정보를 공유한다”면서 “그러나 미국이 한국을 믿지 않기 때문에 일본이 얻은 북핵 정보를 한국과 공유하기가 상당히 어렵다”고 말했다. ‘안보 망언’이라 할만큼 노골적이고도 비외교적인 언사였다. 의원들이 나서 한국 정부의 입장을 고쳐야 한다는 주문으로도 들린다.
이 발언이 공개되자 정부는 24일 “한미관계와 한국의 대북정책에 대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유감을 밝혔고, 당국자들은 “해도 너무 한다”고 반응했다.
일본의 이런 태도는 사실 이 뿐만이 아니었다. 한국이 북핵 위기설 속에서 평화적 해결을 위해 고군분투하던 이 달 중순 마치무라 노부다카(町村信孝) 외무성 장관은 북한을 제외한 5자 회담을 열어야 한다고 주장, 찬물을 끼얹었다.
일본 차기 총리로 거명되는 아베 신조(安倍晋三) 자민당 간사장 대리도 이 달 초 북한 제재 필요성을 강조하고, 지난 15일에는 납치자 문제 해결을 위해 일본 단독으로라도 북한을 제재하는 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북한의 일본인 납치에 분개하는 일본 국민의 정서와 미국의 대북 강경기류에 편승하는 일본의 이런 태도는 당분간 바뀔 것 같지 않다. 그 흐름 속에서는 한국의 입장은 아랑곳 하지 않는 것이다.
특히 전략적 유연성, 동북아 균형자론 등 한미간 껄끄러운 현안이 불거지면서 불편한 한미관계를 즐기는 듯한 일본측 속내도 여과 없이 드러나고 있다. 니혼게이자이 신문은 25일 “내달 한미정상회담에서 한국이 반대하는 작전계획 5029에 대해 미국이 문제를 제기할 것”이라고 전했다. 한국 정부가 북한의 급변사태 때 한미 군대의 작전계획을 의미하는 작계 5029가 주권 침해 소지가 있다고 판단, 미측의 양해를 구하는 상황에서 이런 보도는 상처에 메스를 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당국자들은 “일본 정부 못지않게 일본 언론도 문제”라며 “북핵 6월 위기설, 미국의 제한 북폭설 등은 일본 언론이 증폭해온 사안”이라고 불만을 토로했다. 최근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은 “일본이 북한 핵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게 만든다면 한국에 대해 또 다른 ‘과거사’만드는 것”이라고 의미심장한 발언을 했다.
이제 일본 정치인들의 과거사 망언에만 흥분할게 아니라 한국의 안보 지형을 침해하는 일본의 안보망언에도 촉각을 곤두세워야 할 때다.
이영섭기자 young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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