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을 고답적으로 받아들이는 이들에겐 ‘스타 문인’이라는 말이 거슬릴 수도 있겠지만, 황지우(53)는 스타 문인이다. 포털사이트 네이버의 작가 검색 순위에서 황지우라는 이름은 늘 첫째 자리나 그 언저리에 있다.
첫째 자리를 놓고 그와 겨루는 이름은 시사평론이라는 ‘비문학적’ 장르와 바짝 붙어있는 진중권이나, 인터넷 청소년소설로 널리 알려진 귀여니 정도다. ‘문단’ 구성원으로서 네이버 검색 순위에서 황지우를 뒤쫓고 있는 사람은 한강인데, 그것은 이 여성 소설가의 이름이 남한의 대표적인 강 이름과 같은 데서 비롯된 해프닝일 것이다.
포털사이트의 검색 순위가 어떤 기표의 대중적 노출도와 대체로 비례한다면, 이른바 본격문인 가운데 황지우 이상으로 대중에게 노출된 사람은 없다.
그러나 사람들이 인터넷에서 작가 이름을 검색하는 동기의 적잖은 부분은 학교 안팎에서의 문학 수업과 관련 있을 터이므로, 황지우라는 이름의 대중적 노출을 연예인의 그것과 나란히 놓을 수는 없다. 다시 말해, 황지우라는 이름 안에는 대중적 친화감과 문학적 아우라가 최고 수준에서 동거하고 있다. 그는 복 받은 시인이다.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1983년)는 한국 문단에 황지우라는 특급 브랜드를 등록시킨 시집이다. 이 브랜드의 두 축은 인유와 몽타주다. 이 둘은 자주 한 작품 속에서 서로 스며들어 독특한 미적 정치적 효과를 자아낸다.
예컨대 ‘숙자는 남편이 야속해--KBS2TV 산유화(하오 9시45분)’라는 제목의 작품은 신문의 방송 면에 실린 멜로드라마 소개 기사와 공중화장실 벽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음담패설을 나란히 배치함으로써, 방송 드라마라는 것이, 그리고 그것을 소개하는 신문기사라는 것이, 화장실 벽의 낙서와 다를 바 없음을 드러낸다.
또 ‘한국생명보험회사 송일환씨의 어느 날’이라는 시는 신문의 ‘미담기사’와 ‘대도(大盜)’ 조세형의 어마어마한 장물 목록을 포개놓음으로써, 올곧은 삶을 우스꽝스럽게 만들어버리는 사회의 병리를 되돌아보게 만든다. 한 마디로, 황지우 시의 인유와 몽타주는 익숙한 일상을 갑자기 낯설게 하고, 그럼으로써 자각하게 한다.
이런 문학적 실험은 “나는 말할 수 없음으로 양식을 파괴한다. 아니 파괴를 양식화한다”라는 시인 자신의 선언을 왁자하게 구현하고 있다. 황지우 시의 새로움은 일찍이 김수영이 시도한 일상적 보고로서의 시를 내용 층위에서 극단화한 데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시를 형식 수준에서 일종의 그림으로 만든 데 있다.
시인은 활자들을 마음 쏠리는 대로 배열하고 비문자(非文字)기호들을 과감히 채용함으로써, 시를 듣는 것이 아니라 보는 것으로 만들었다. 이 시집에는 실리지 않았으나, 활자들을 세모꼴로 배열한 ‘무등(無等)’(두 번째 시집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에 수록) 같은 작품은 지난 세기 초 기욤 아폴리네르가 표나게 실천해 보인 ‘아름다운 그림이나 글자’(칼리그람)로서의 시를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무등’ 얘기가 나온 김에, 시집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가 부분적으로는 1980년 5월의 기억에 들려있다는 것을 지적해야겠다. ‘흔적 III 1980(5.18x5.27cm) 李映浩 作’이나 ‘묵념, 5분27초’ 같은 작품은 제목부터 대뜸 광주학살을 환기시키고 있다. ‘묵념, 5분27초’는 본문 없이 제목만으로 이뤄진 시다.
또 “산(山) 전체가 뫼똥이다/ 거기까지 거적때기에 질질/ 끌려간 자국이 나 있다”(‘만수산 드렁칡 4’)거나, “그녀를 무등 태운 산(山) 그림자가 시내까지 따라온다.(...) 시(市) 외곽 시립 공원 묘지 천(千)여 구를 싣고 청계천까지 흘러온다”(‘에서. 묘지. 안개꽃. 5월. 시외버스. 하얀’)거나, “김종수 80년 5월 이후 가출/ 소식 두절 11월3일 입대 영장 나왔음/ 귀가 요 아는 분 연락 바람 누나/ 829-1551”(‘심인’) 같은 구절들에서도, 시인은 학살의 악몽에 들려있다.
시인이 발설하고 실천한 양식의 파괴 또는 파괴의 양식화는 80년대 한국 문단에서 흔히 해체시라는 주제어 속에 용해되었다. 그 때의 해체는 이 말을 유명하게 만든 자크 데리다나 폴 드 만의 해체와는 깊은 인연이 없었으나, 그 둘은 동일한 기표 아래 마구 뒤범벅돼, 80년대 말에 이르러 황지우라는 이름은 탈구조주의나 포스트모더니즘의 맥락에서도 거론되게 되었다.
결국 황지우를 오늘날의 스타 문인으로 만든 출발점은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에서 선보인 ‘파괴의 양식화’다. 그러나 이 시집의 아름다움은 그런 형태파괴 시보다는, 드문드문 박힌 전형적 서정시 속에 있다는 것을 지적해야겠다.
내가 이 시집에서 가장 좋아하는 작품은 시인의 등단작 ‘연혁(沿革)’이다. “앞 바다의 흩어진 물결들”에서 “청태(靑苔)밭 가득히 (몰려온) 찬비”로, “우기(雨期)의 처마밑”에서 “만조(滿潮)를 이룬 저의 가슴”으로, “(토방문을 빠져나가는) 빠른 물살”에서 “낮은 연안(沿岸)”으로, “늦게 떠난 목선(木船)”에서 “장독의 작게 부서지는 파도 소리”로, “근시(近視)의 겨울바다”로, “인광(燐光)의 밤바다”로, “바다의 내심(內心)”으로 끝없이 이어지고 확대되는 물의 이미지는, 삽화로 끼인 잔혹한 죽음의 이미지에도 불구하고, ‘연혁’의 독자를 아름다움에 취하게 하고, 황지우가 그 시적 출발에서부터 재능있는 서정시인이었음을 증명한다. 또 ‘초로(草露)와 같이’를 읽는 내 마음은 존재의 허약함에 진저리치며 “저 타오르는 불 속으로”, “그대 이슬 속으로” 빨려 들어가 급성 다행증(多幸症)으로 어질어질하다.
그러나 20여 년 만에 이 시집을 다시 읽으며, 황지우 브랜드의 고갱이인 ‘파괴의 양식화’에서, 그것을 실천한 많은 시들에서 예전의 서늘함을 느끼지 못했음을 고백해야겠다. 그것은 내가 이 시들을 쓴 청년보다 너무 나이가 들어버렸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나이는 사람을 둔하게 만들거나 꾀까다롭게 만든다.
어느 쪽이든, 나는 문학적으로 보수화한 것 같고, 내 보수주의는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의 ‘풀려있는’ 상태에 서먹하다. ‘신림동 바닥에서’ 같은 서정시에서 드물게 화자의 객관화가 이뤄지곤 있지만, 이 시집은 지나친 자기연민이 낳은 엄살로, 자학의 분무기를 통한 자기현시로, 요컨대 자기집착으로 잉잉거린다. 시인의 재능은 자신을 감추는 데보다 드러내는 데 더 있는 것 같다.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에서 펄럭이는 것은 떠남의 욕망, 또는 먼 곳에 대한 그리움이라고 부를 만한 낭만적 파토스다. 비평가 김현은 이 시집의 낭만주의가 “도피와 일락의 낭만주의가 아니라, 새로운 삶을 희구하는 남성적 낭만주의”라고 말한 바 있으나, 사실은 그 반대다.
작품의 화자나 피인유자가 “여기에 있다는 게 챙피해. 모독감 때문에 온몸이 부르르 떨린다구”(‘이준태(1946년 서울 생. 연세대 철학과 졸. 미국 시카고 주립대학 졸)의 근황’)라거나, “아, 노령 연해주 땅으로, 멀고 안 보이는 나라로 들어가 버린 듯하지요”(‘목마와 딸’)라고 말할 때, 그것을 도피의 낭만주의가 아니라고 볼 근거는 없다.
그 시대의 자각된 영혼들에게 깊은 울림으로 꽂혔을 산뜻한 표제시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에서도, 떠남의 욕망과 떠나지 못함의 좌절만 파닥거리고 부글거릴 뿐 새로운 삶의 모습은 그 윤곽조차 그려지지 않는다.
아마도 그런 도피의 욕망이,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를 사랑의 언어라기보다 환멸과 저주의 언어로 만들었을 것이다. 이 시집의 언어는 좀처럼 세상을 보듬지 못한다. 정치적으로 가팔라질 때조차, 그 언어들은 시인의 몸 안에 갇혀있다. 어쩌면 ‘비화(飛火)하는 불새’나 ‘자물쇠 속의 긴 낭하’ 같은 작품에서 엿보이는 시인의 끔찍한 고문 체험이 그의 내면을 황폐하고 납작하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시집에는 형식적으로도 너무 헐거운 작품들이 점점이 박혀있다. 예컨대 광주학살 이후 한국의 억압적 상황을 은유한 듯한 “여기는 초토입니다// 그 우에서 무얼 하겠습니까// 파리는 파리 목숨입니다// 이제 울음소리도 없습니다// 파리 여러분!// 이 향기 속의 살기에 유의하시압!”(‘에프킬라를 뿌리며’ 전문)같은 구절들에는 아무런 언어적 긴장도 없다.
이것이 시라면, 김수영이 박인환을 욕하며 발설한 ‘신문기사만도 못한 시’일 것이다.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는 80년대 이래 한국 시에 화려함을 보탠 시집이지만, 그 화려함은 도드라져 보였던 만큼이나 황폐한 화려함이었다.
▲ 초로(草露)와 같이
오 환생(幻生)을 꿈꾸며 새로 태어나고 싶은 물소리, 엿
듣는 풀의 누선(淚線), 살아 있는 것은 살아 있는 동안의
이름을 부르며 살 뿐, 있는 것이 있는 것이 아니고 사는 것이
사는 것이 아니로다 저 타오르는 불 속은 얼마나 고요할까
상(傷)한 촛불을 들고 그대 이슬 속으로 들어가, 곤히, 잠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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