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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성과의 대담] (2) 하스미 시게히코 교수-황영식 논술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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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성과의 대담] (2) 하스미 시게히코 교수-황영식 논술위원

입력
2005.05.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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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일 개막한 제2회 서울국제문학포럼 참석차 방한한 하스미 시게히코 도쿄(東京)대 전 총장을 본보 황영식 논설위원이 만났다. 영화에서 교육문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주제에 걸친 이야기를 간추려 옮긴다.

황 : 선생님은 영화평론가로도 유명하신데 칸 영화제에는 다녀 오셨습니까.

하스미 : 가지 않았습니다. 특별초대를 받는다면 몰라도 스스로 가 보고 싶은 영화제는 아닙니다. 사교장 같은 느낌이 들어서. 이탈리아 볼로냐처럼 새로 발굴한 무성영화만을 상영한다든가 하는 특별한 영화제라면 가고 싶지만 요즘은 바빠서도 못 갑니다.

황 : 한국영화의 힘이 커지고 있고, 국제적 평가도 높습니다. 한국영화를 자주 보신다고 들었는데 어떤 인상을 받으셨습니까.

하스미 : 1980년대부터 한국영화를 봐 왔습니다. 개인적으로 80년대 이장호 감독의 영화가 가장 좋습니다. 한국영화가 많이 성장했지만 아직 이 감독 수준에는 이르지 못했다고 봅니다. 요즘은 정재은 감독에게 기대를 걸고 있지요. ‘고양이를 부탁해’는 멋진 영화였습니다. 재미있는 영화가 많이 만들어지고 있어 일본에서 볼 수 없는 신작이라면 외국에서라도 반드시 봅니다.

황 : 선생님이 느끼시는 영화의 재미는 대중들의 느낌과는 거리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한류붐에 대해서도 독특한 시각을 가지고 계실 법한데….

하스미 : 한국 드라마나 영화가 일본에서 인기를 끌고, 일본 TV 광고에 한국 배우가 나오는 것 등은 지금까지 없었던 재미있는 현상입니다. 그렇다고 한국을 바라보는 일본의 눈이 정말 바뀌었을까 하는 점은 의문입니다. 한류붐에는 거품이 끼어있고, 유행이어서 그리 길지는 않을 것으로 봅니다.

황 : 그래도 한국에 대한 관심이 커지는 등의 변화는 뚜렷한 것 아닌가요. 과거 한국에 무관심했던 시절에 비하면 관심의 내용이 어떤 것이든 양적 성장은 좋은 관계로 가는 기본 조건이라고 봅니다.

하스미 : 한국 영화를 좋아하는 일본 젊은이들 가운데 이장호나 배창호 감독을 아는 사람이 드뭅니다. 과거의 강점과 전통을 현재와 이어 보지 못하는 거지요. 또 재일 한국인 감독들의 영화에 대한 반응도 별로 달라진 게 없습니다. 전면적인 변화가 아니라 TV드라마나 요리에 대한 흥미가 중심이어서는 지속력을 갖기 어렵지요.

황 : 프랑스 소설이 전공이신데, 서사를 공유하고 이미지를 보완하는 소설과 영화의 상호작용은 본질적인 것인가요. 한국에서는 대중적 영화가 소설의

활동공간을 제약하는 경향까지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스미 : 유럽 역사에서 소설은 고전, 즉 그리스 시대의 문학에는 없던 장르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은 서사시와 서정시, 연극을 다루었을 뿐입니다. 유럽 문학사에서 소설은 ‘부모를 닮지 않은 아이’ 같은 존재지요. 19세기에 1만부 팔리던 신문이 연재소설을 실으며 40만부로 늘었다는 얘기가 있듯 소설 자체가 대중화의 한 양상입니다. 19세기 대중문화를 소설이 일구었다면 20세기에는 영화가 그 역할을 한 것이지요. 그래서 소설과 영화의 관계는 본질적이고,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황 : ‘디지털 혁명’이 유행어가 돼 있는데 영화는 어떤 변화를 겪으리라 보십니까. 진화와 문명의 커다란 관점에서 언어나 문자의 발명에 비할 때 디지털 혁명의 의미는 상대적으로 축소해 볼 수 있다고도 생각합니다만.

하스미 : 산업 측면이라면 모르겠지만 영화 자체로는 별 변화가 없을 겁니다. 디지털로 찍을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있지요. 달리 말하면 디지털로 거의 모든 것을 찍을 수 있지만 디지털로 찍어서 특별히 좋다고 할 만한 영화는 본 적이 없습니다. 제작 기술로서의 의미는 어디까지나 방법일 뿐 목적이 아니어서 지나친 기대는 금물입니다.

황 : 한국에서는 스크린쿼터제가 중요한 문화다양성 유지의 수단으로 거론되고 있습니다. 한국영화를 보호하고 민간 투자를 촉진하는 등의 일부 순기능은 인정하지만 그것 또한 장기적으로는 부정적 요소가 아닐까요.

하스미 : 보호막이 없어졌을 때 어떻게 경쟁력을 갖느냐가 중요합니다. 현재 세계에서 미국 영화 점유율이 70% 이하인 나라는 한국과 일본, 프랑스, 인도 정도인데 프랑스나 한국은 국가가 보호하지만 일본은 그런 보호막 없이도 영화가 살아 있습니다. 영화시장에는 문화다양성 요소가 이미 갖춰져 있습니다. 흔히 미국 영화의 힘을 말하지만 진짜 미국 영화는 20% 정도밖에 안 됩니다. ‘반지의 제왕’을 미국 영화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저는 이상합니다. 뉴질랜드 영화, 아니면 무국적 영화라고 봐야지요.

황 : 화제를 바꾸겠습니다. 서울대가 교육부와 입시제도를 두고 논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도쿄대도 여러 논의가 있었는데 현재 어떤 상태입니까.

하스미 : 밖에서는 많은 이야기가 있지만 대학에는 영향이 없습니다. 대입제도는 미국에서 배워야 할 점이 많습니다. 기본적으로 대학이 신입생을 스카우트합니다. 고등학교에 가서 필요한 학생을 고릅니다. 어떤 사람의 입학을 배제하는 장치가 아니라 어떤 사람을 뽑는 제도로 다듬어가야 하는데 한국이나 일본은 평등주의 풍조 때문에 어려울 것입니다.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인 고시바 마사토시(小柴昌俊ㆍ도쿄대 명예교수)씨는 대학원생을 뽑을 때 성적이 좋지 않지만 학부 때 ‘찍어 둔 ’ 학생들을 뽑아서 성공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사람을 보는 특별한 눈이 있다는 점을 사회가 얼마나 인정할 수 있느냐가 관건이겠지요.

황 : 일본의 국립대학 행정법인화 개혁은 어떻게 돼 가고 있습니까. 이공계라면 몰라도 인문사회계를 기업처럼 성과 중심으로 운영한다는 얘기가 허황돼 보입니다. 오히려 학문과 전인적 인격 양성이라는 대학의 고유기능이 위축되는 것 아닙니까.

하스미 : 대학이 법인격을 갖게 돼 필요하면 기업처럼 은행에서 대출을 받는다든지, 교수가 교육공무원법 대신 근로기준법 적용을 받고, 노동조합을 결성할 수 있게 된 것 등은 좋은 변화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러나 대학은 사회를 바꾸기 위해 존재하는 것인데 기업형 대학은 똑 같은 사람을 만들어 내는 데 치중하게 됩니다. 또 논문발표나 인용 건수를 평가의 잣대로 삼는 것은 인문사회계에서 적지 않은 문제입니다. 서로 논문을 인용하면서 국제 학계에 이상한 패거리 의식을 만들어 정말 좋은 논문이 오히려 인용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대학은 연구 기능뿐만 아니라 교육 기능도 중요합니다. 신입생에게 가장 훌륭한 교수를 붙여야 하는데 기업형 대학에서는 어렵습니다. 노벨상 수상자인 도네가와 스스무(利根川進)씨는 MIT에서 줄곧 학부 1,2년생을 가르쳤습니다.

황 : 한일 관계는 언제든 과거사 문제로 휘청거립니다. 지금도 독도문제나 역사교과서 문제로 냉각돼 있지요. 근본적인 해결 가능성은 없습니까.

하스미 : 야스쿠니(靖國) 신사에 참배하는 총리를 가졌다는 것은 정말 이상한 일입니다.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총리는 과거의 공약을 지키고 있다지만 그것이 그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한중 양국이 하지 말라고 요구하고 있는 마당에 ‘앞으로 일본이 전쟁을 하지 않도록 다짐하고, 전사한 사람들의 명복을 빌기 위해서”라는 설명이 통하겠습니까.

황 : 야스쿠니신사 문제는 중국에는 정말 큰 문제입니다. 과거 중일 국교정상화 당시 중국은 과거사를 일본 국민과 무관한 일부 군국주의 지도자들의 소행으로 돌리고 그런 이유로 국가배상을 포기한 바 있지요. 그 ‘군국주의 지도자’인 A급 전범을 합사한 신사에 일본 총리가 간다는 것은 국교정상화 자체를 무시하는 것이 됩니다.

하스미 : 바로 그 점이 걱정입니다. 반면 교과서 문제는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교과서에 있는 것 그대로 외우는 인간은 바보라는 것이 교육계의 일반적 생각이고, 교사와 학생이 제대로 돼 있다면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다고 봅니다.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의 생각에는 완전히 반대지만 그 교과서로 배운 학생이 엉터리 역사인식을 가지리라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사회의 다양성 속에 묻힐 수 있는 요소라고 봅니다.

황 : 어쨌든 과거처럼 일본이 잘못을 반성하고, 사죄했다가 어느 정도 시간이 가면 다시 ‘헛소리’가 나오는 식이어서는 안 됩니다. 일본도 변해야 하고, 어쩌면 한국도 변해야 궁극적 해결이 가능한 것 아닐까요.

하스미 : 한일 양국간의 사죄와 반성, 화해도 중요하지만 이를 양국간의 가해ㆍ피해 문제로 한정하지 말고, 인류사적 시각에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20세기 전반 일본제국주의가 인류에 대한 범죄를 저질렀다는 인식이 분명해져야 합니다. 나치의 범죄처럼 세계사의 문제로 파악해야지요. 그렇게 다른 나라 학자들과 사람들도 알아야 하고, 그 안에서 구체적 가해ㆍ피해를 인식해야만 해결의 전망이 섭니다.

황 : 선생님은 도쿄대 총장 시절 서울대와의 교류협정 체결 등 한일 교류에 적극적이셨는데 어떤 특별한 구상이 있었습니까.

하스미 : 불문학자가 총장을 맡자 많은 사람들은 유럽대학과의 친선을 도모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저는 한국, 중국과의 교류에 노력했습니다. 21세기를 겨냥할 때 한국과 일본, 중국이 힘을 합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소신 때문이었지요. 서로를 이해하자고 하는 동안 50여년이 훌쩍 흘러 가버린 것을 보고 중요한 것은 서로 이해하는 데 머물게 아니라 함께 무엇인가 제3의 일을 해나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양국 불문학자의 공동연구 등 제3의 과제를 향한 노력이 필요하고, 그것이 상호이해에도 첩경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 하스미 시게히코(蓮實重彦)는…

1936년 일본 도쿄(東京)에서 태어났다. 동경대를 나와 파리4대학에서 불문학을 수학했으며, 도쿄대 총장을 역임했다. 불문학자이자 문학평론가이며, 국립대 개혁과 평화헌법 수호운동 등 현실 역사 문제에 개입해 온 진보적 좌파 지식인. 세계적인 영화평론가로도 잘 알려져 있으며 '링'을 감독한 히데오 나카타나, 기요시 구로사와 등 일본 유명 영화감독들을 지도했다.

◆ 황영식(黃永植) 논설위원은…

1958년 경북 문경 출생. 85년 한국일보사에 입사, 정치부 국제부 문화부를 거쳐 도쿄특파원과 문화부장을 지냈다. 현 논설위원. 저서로 '맨눈으로 보는 일본'(모티브) 등이 있으며, '10년 불황, 그래도 희망은 있다'(용오름) 등의 역서를 냈다.

정리=최윤필 기자 Walde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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