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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규씨 사형25주기 옥중면담록 첫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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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규씨 사형25주기 옥중면담록 첫 공개

입력
2005.05.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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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년전인 1980년 5월24일.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재규씨는 사형선고가 내려진 지 4일 만에 서울 서대문구치소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본보는 사형선고가 내려진 5월20일과 22일, 23일에 김재규가 수감돼 있던 육군교도소로 면회 온 가족들과 변호사와의 대화 내용을 적은 옥중 면담록을 단독입수했다. 총 52쪽의 면담록에는 ‘특정수감자 접견동향 보고’라는 제목과 함께 날짜와 면회자 등의 이름이 적혀 있으며, 대화내용이 타이프로 인쇄돼 있다. 그 내용을 요약, 공개한다.

20일 오전10시45분 김재규는 여동생 등 친척들의 방문을 받았다. 김은 진행 중인 대법원 선고 결과에 대해서는 묻지 않고 심취한 불교에 대해서만 이야기했다.

김은 “마음의 지성이 바로 신(神)이다. 석가가 깨달은 것은 신을 깨달은 것이고 사람이 즉 신인데 망상이 생겨 신이 나타나지 못하는 것이다. 불교가 위대한 것은 하나도 보지 않아도 (자신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고 말했다.

오후1시35분 변호사들이 찾아와 사형이 선고된 과정을 들려줬으며, 김은 부하들과 국민에게 전할 당부의 말을 남겼다. 김은 “자유를 회복시킨 것은 진리를 회복시킨 것이니 죽을 때에는 ‘대한민국 만세, 자유민주주의 만세, 10ㆍ26혁명 만세만은 부르고 가자.

지금 우리는 가지만 10ㆍ26혁명만은 언젠가 빛을 보게 마련이다는 말을 부하들에게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또 “대장부가 세상에 태어나 국민 모두가 말하는 자유회복을 하고 가니 보람은 있다.

지금은 10ㆍ26사태라고 하지만 앞으로는 10ㆍ26혁명이라고 부를 것이고, 이를 연구하는 분들은 나의 최후진술을 참고 하게 될 것이다. 국민에게 자유가 떠나지 않도록 잘 지키라는 말을 신문 등을 통해 발표해 국민에게 알려달라”고 당부했다.

오후2시35분 장인 동서 처형 등 처가 식구의 방문을 받았다. 김은 “나는 죽는 것이 내일이 될지 모레가 될지 모른다. 나를 중심으로 내 옆에 박흥주 대령과 박선호 과장 순으로 묻어달라. 지금은 역적이 되지만 늦어도 내년 봄이면 다 풀린다”고 말했다.

22일 오전10시30분 부인과 여동생들이 찾아왔다. 김재규는 반야심경과 천수경전문을 5분간 읽어줬고 가족들은 합장한 자세로 눈물을 흘렸다. 김은 “우리는 유(有)로 생겼다가 무(無)로 돌아가니 내가 가는 것을 서운하게 생각하지 말라. 3심은 끝났지만 4심은 하늘이 하는 것이다. 하늘의 심판에는 (내가) 이길 것이다”고 말했다.

그는 또 “생전에 사람 죽인 일이 없는데 이번 일로 많은 원수를 만들었다. 내가 대통령이 되기 위해 박 대통령을 죽였다고 하는데 사람을 죽인 사람이 어떻게 대통령이 될 수 있나. 그런 말로 나를 평가한다면 내 정신을 그림자도 평가하지 못하는 것이다”고 말했다.

오후 3시55분 김의 어머니 권모씨와 동생이 면회를 왔다. 모자간의 마지막 만남이다. 권씨는 “마음을 편안히 생각하고 당황하지 말아라. 괴로울 때는 관세음보살을 찾아라. 여기(교도소)에 일하는 사람과도 다 인연이라고 생각해라. 후세에는 만나게 돼 있다”고 말했다. 김은 접견실에 비치된 군용 담요를 깔고 눈물을 흘리며 큰절을 세 번했다.

23일 오전10시25분 형 집행 바로 전날 김은 동서와 처남 등에게 사형 집행이 가까워진 것을 예감한 듯 유언을 남겼다. 김은 “내가 죽거든 군복인 동정복에 계급장을 붙이고 근정훈장을 달아라. 검은 양말과 구두를 신기고 오른 손에는 상아 지휘봉을, 왼손에는 약력을 창호지에 적어 넣어 달라.

나무로 묘비를 세우되 장군이란 호칭을 붙여 ‘의사 김재규 장군 지묘’라고 하라”고 말했다. 그는 또 “내가 사형되면 국민 감정이 돌아서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고 내 죽음이 결정적 모멘트가 될 것이다.

그러나 적화는 막아야 한다. 나의 기본 뜻은 민주화를 해 적화를 막는 것이다”고 말했다. 그는 부인에게 재산을 정리해서 부하들 가족에게도 가족처럼 나눠주라고 당부하기도 했다. 김은 접견을 끝내며 가족에게 일본어로 “형 집행이 24일 오전10시가 아니냐”고 물었으나 가족들은 “다음주 화요일에 다시 오겠다”고만 답하고 돌아갔다.

오전11시25분 김은 동생과 조카 등의 접견을 받았다. 김은 조카에게 “우리 족보를 보면 아들이 없어 양자를 입적한 예가 많았고, 내 대에도 그렇게 해야겠다. 내 말을 알아들었으면 큰아버지에게 큰절을 해라”고 말했다.

김은 이어 접견실 바닥에서 큰절을 한 조카의 팔을 잡고 한동안 눈물을 흘렸다. 이것이 그의 생에 가족과의 마지막 만남이 됐다.

▦ 사형집행 순간

"할말 없다" 염주 쥔채 최후

김재규는 5월24일 새벽4시40분 서울구치소로 이송됐다. 구치소 측은 형 집행이 아닌 단순 이감조치라고 안심시켰으나 3시간도 지나기 전인 오전7시30분께 형 집행을 통고했다.

김은 창백한 얼굴로 걸어가다 형장을 10여m 앞두고는 몸을 가누지 못하고 순간적으로 정신을 勞?교도관들에 들려가다시피 형장으로 들어갔다. 군인 및 검찰관계자 등 40여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형 집행이 시작됐다. 김은 약간 분노한 듯한 표정 속에 한편으로는 체념한 듯한, 다소 이중적인 모습으로 허공을 바라 보았고 눈가는 젖어 있었다.

종교의식 제의를 거부한 뒤 “할 말이 없느냐”는 질문에 “할 말 없다”고 입을 다문 뒤 합장한 채 어머니로부터 받은 염주를 손에 쥐고 최후를 맞았다.

신기해기자 shinkh@hk.co.kr

강철원기자 strong@hk.co.kr

■ 그때 그 사람들… 지금은

10ㆍ26사태 당시 궁정동 안가에 있었던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박선호 의전과장, 박흥주 대령, 김계원 비서실장, 심수봉과 신재순씨 그리고 정승화 육참총장. 영화 ‘그 때 그 사람들’에도 등장했던 이들의 지금은.

사건 직후 남한산성 육군교도소에 수감돼 있던 김재규는 1980년 5월24일 사형이 집행됐고, 해병대 대령으로 예편해 1978년 8월부터 중정 의전담당으로 일했던 박선호(당시 45세)도 김재규와 운명을 같이했다. 현역 군인으로 유일하게 10ㆍ26사태에 참가했던 중정부장 수행부관 박흥주(당시 40세) 대령은 계엄군법회의의 형 확정으로 1980년 3월 6일 관련자 중 가장 먼저 사형이 집행됐다.

당시 육군참모총장으로 12ㆍ12사태 당시 체포ㆍ연행됐던 정승화(당시 50세)씨는 내란기도 방조혐의로 체포, 직위해제ㆍ이등병 강등 후 불명예 전역하는 비운을 겪었다. 정 전 총장은 이후 김영삼 정권 시절인 1997년 무죄를 인정받아 명예회복, '예비역 육군대장'이자 '전 육군참모총장'의 직위를 회복했지만 줄곧 야인으로 지내다 2003년 6월 노환으로 생을 마감했다.

유일하게 궁정동 현장에서 생존한 김계원 전 비서실장(82)은 살인 및 내란미수죄로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으나 복권됐으며, 현재 서울 압구정동에서 가족과 지내고 있다.

궁정동 만찬에 배석했던 가수 심수봉(50)씨와 모델 신모(49ㆍ당시 한양대 연극영화과 3년)씨는 사건 이후 한동안 은둔하다 1994년 나란히 자서전을 출간, 당시 상황을 담담히 털어놓기도 했다. 이후 심씨는 방송생활을 계속하고 있으며, 신씨는 사건 직후 미국에 이민했다 결혼 후 귀국해 평범한 주부로 지내고 있다.

강철원기자 strong@hk.co.kr

■ 김재규씨 유공자 추진상황

김재규씨가 ‘민주화 유공자’라는 주장은 10ㆍ26 직후부터 일각에서 꾸준히 제기돼 왔다. 하지만 공식 인정을 위한 노력은 2001년부터 본격화했다. 2000년 국무총리 산하에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민주화심의위)’가 만들어 지면서 이듬해 10월 26일 김씨의 5촌 조카 김진백씨가 그의 민주화운동 관련자 인정 신청을 한 것.

신청 실무는 ‘10ㆍ26 재평가와 김재규 장군 명예회복추진위원회(추진위원회)’가 맡았다.

2000년에 이돈명 강신옥 변호사, 함세웅 신부, 청화 스님 등 법조ㆍ종교계 인사를 중심으로 구성된 이 단체는 “박정희 독재정권을 무너뜨리는데 학생ㆍ재야단체의 활동은 역부족이었지만 김재규의 행동은 결정적이었다”며 발 벗고 나서고 있다.

김진백씨의 신청은 ‘해당자의 4촌 이내’ 범위를 벗어난 점 등 신청자의 적격성이 문제돼 지난해 기각됐지만 이 단체는 김씨의 미망인 김영희씨를 통해 작년 7월12일 심의를 재신청했다.

현재 심의는 민주화심의위 ‘관련자 및 유족여부 심사분과위원회’에서 ‘보류 및 계속 조사’ 상태에 있다. 이종구 성공회대 교수를 위원장으로 하고, 김동민 한일장신대 교수, 이은경 민주화운동정신계승 국민연대 사무처장 등 학계ㆍ시민단체 인사 등 9명의 위원으로 구성된 이 위원회는 본위원회로 안건을 넘기기 전에 사전심의를 하는 전문기구.

작년 8월 9일 이 위원회는 10ㆍ26 사건 재판 당시 육본계엄보통군법회의 검찰관을 맡은 전창열 변호사와 김씨를 변호한 강신옥 변호사 등을 불러 당시 상황을 들었으나 ‘인정’과 ‘기각’ 여부를 결정하지 못하고 애매한 ‘보류 및 계속 조사’ 결정을 내렸다.

추진위 김범태 집행위원장은 “작년 8월 이후 지금까지 자료 추가제출이나 관련자 출석 등 심의위측으로부터 아무런 요청도 없었다”며 “최근 과거사 문제 등과 겹치면서 민감한 사안이다 보니 심의위측에서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것 같아 계속 기다리고 있는 중”이라고 말했다.

신기해기자 shink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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