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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공부야 놀자/ 교육칼럼 - 사랑의 매도 아픈 기억만 남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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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공부야 놀자/ 교육칼럼 - 사랑의 매도 아픈 기억만 남아

입력
2005.05.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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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사다 주신 장난감 총을 학교에서 잃어버려 종아리를 맞았던 것이 초등학교 1학년 때 일이다. 빗자루 매질을 보다 못한 할머니는 우는 나를 업고 집 멀찍이 피신을 갔다가 해거름이 되어서야 돌아오셨다. 2학년 때에는 만화 삼매경에 푹 빠져 배가 아픈 것을 꾹꾹 참다가 바지에 똥을 싼 일로 어머니에게 바보 같은 녀석이라고 볼기짝을 맞았다.

3학년 때에는 부엌 구석에서 노래기를 잡는다고 어머니가 애지중지하던 미제 헤어스프레이 한 통을 깡그리 바닥내는 바람에 역시 빗자루로 한참을 맞았다. 수십 년이 지난 일이라 정작 부모님은 기억도 못하시지만 나는 어린 시절 기억이 생생하다. 많이 서러웠던 탓일 것이다. 물론 지금은 미소와 함께 떠오르는 아련한 추억일 뿐이며, 잘못했을 때에는 매 맞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겼던 시절의 일이기도 하다.

요즘 아이들은 부모의 체벌이나 폭력에 대해 아주 민감하다. 서울 지역 남녀고등학생 250명을 표본으로 조사한 결과, 86명의 학생들이 부모의 체벌이나 폭력에 대해 분노와 원망과 실망을 느낀다고 응답하였다. 아이들이 고백한 감정은 수치심, 우울, 혼란, 충격에서부터 공포, 절망, 적개심, 자살 충동과 같은 심각한 것들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어렸을 때부터 심하게 맞고 자랐다. 한번 맞았다 하면 피멍이 들고 코피가 나기도 했다. 아빠는 한번 화가 나면 인사불성이다. 눈은 맹수처럼 광이 나고 미친 사람 같다. 아빠만 보면 뱃속에서 화가 치밀고 이유 없이 기분이 망가진다. 아빠가 소리를 지르면 무섭기도 하고 한 대 날리고 싶다.”(여고 2학년생)

“초등학교 생활기록부 행동발달상황 기록에 ‘내성적’이라고 써 있는 것을 본 아버지가, 남자가 왜 내성적이고 소심하냐며 때렸다. 정말 살기 싫었다.”(남고 2학년생)

주먹으로 뺨이나 배를 맞았다는 아이도 있고, 야구방망이나 곡괭이자루로 맞았다는 아이에 골프채로 맞았다는 아이도 여러 명 있었다. 부모에게 매를 맞은 경험은 초등학교 1~3학년 때에 집중적으로 나타나는데(구타 경험 학생의 37%), 매 맞고 가두어졌다거나 발가벗겨져서 내쫓겼다거나 하는 식으로 학대를 받은 아이도 9명이나 있었다.

아이의 잘못을 모질게 다루는 부모들의 대답은 한결같다. 다소 심하게 혼낼 때가 있기는 하지만 다 내 자식 잘 되라고 한 일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부모의 의도와는 달리 매를 맞아 겁에 질린 아이들은 판단력과 학습능력이 현저하게 떨어지게 되므로 부모가 어떤 교훈을 주고자 그랬는지 잘 이해하지 못한다. 아이들은 단지 어떤 사건으로 인해 맞게 되었고, 그 때 얼마나 무서웠는지에 대해서만 기억할 뿐이며, 심지어 앞뒤 정황은 모두 자른 채 매 맞는 장면만을 기억하기도 한다.

“우리 부모는 조금만 잘못해도 말로 하는 법이 없으셨다. 예를 들어 컵의 물을 쏟았다거나 할 때 바로 손이 올라가고 무지 맞았다. 엄마 아빠가 진짜 무서웠다.”(여고 2학년생)

“7살 때 아빠가 갑자기 신발을 신고 방으로 들어오더니 나를 발로 찼다. 미쳤나 보다….”(여고 1학년생)

“내가 태어났을 때 날 이불에 처넣고 목을 졸랐다.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생각만 해도 목이 아프다. 만날 때리고 폭행이 심했다. 눈탱이가 밤탱이가 된 적도 있고 얼굴이 퉁퉁 부은 적도 있었다. 파스도 붙이고, 쫓겨난 적도 있다. 난 정말 불쌍한 아이다. 정말 셀 수 없을 만큼 많이 맞았다.”(여고 2학년생)

(태어났을 때 이불에 처넣고 목을 졸라 생각만 해도 목이 아프다는 마지막 학생의 진술은 사실이 아니라 정신분열 장애에서 흔히 나타나는 망상(delusion)에 의한 것일 가능성이 있다.)

부모에게 폭행을 당한 아이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정서적 특징은 자아존중감이 낮다는 것이다. 때문에 자신의 몸과 마음을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고, 자아 통제를 못하며, 불안과 낙담, 우울 증상으로 인해 심한 경우 자살을 시도하기도 한다. 또한 음주, 흡연, 또래 폭력, 금품 갈취, 윤락 행위 등의 청소년 비행 또한 부모의 자녀 폭력과 밀접한 상관성이 있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간혹 방황하던 청소년이 부모나 교사로부터 모질게 맞은 후에 자신의 잘못을 뉘우친 경우도 있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단순히 매를 맞아서가 아니라 그 매가 사랑과 관심을 재확인하는 계기가 되어 카타르시스를 경험했기 때문이다. 망나니처럼 문제아로 떠돌던 중학교 시절의 어느 날, 자신을 앉혀 놓고 말없이 눈물을 흘리는 엄마를 보고 크게 뉘우쳐 성실한 학생으로 거듭 났다고 고백하는 학생도 있다. 모진 매로 자녀를 개과천선케 한 경우가 있다면 그 매질의 바탕이 자식에 대한 감정적인 화풀이나 비난이 아니라 애정의 채찍질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폭력은 공포를 조장하여 자발성을 억제하고, 자아존중감에 상처를 주며, 또 다른 폭력을 학습하게 한다. 폭력은 자유 의지의 날개를 꺾어버리는 파괴 도구가 된다는 점에서도 아이들에게 행사해서는 안 될 것 중의 으뜸이다.

신규진 서울 경성고 상담전문교사ㆍ‘가난하다고 실망하는 아이는 없다’ 저자ㆍsir90@chollia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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