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밥 짓는 연기여/ 살 타는 냄새가 난다”(‘저녁 꽃밭’)라고 하면, 누구는 ‘배가 덜 고팠구나’ ‘살 타는 냄새, 맡아는 봤어?’라며 눈 부라릴 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내친 걸음!
“아궁이에서/ 일렁이는 불길이/ 얼굴을 적셨으니/ 타고 남은 재를/ 흙바구니에 담아/ 공중에 흩뿌려놓았으니/ 수만개의 별빛이/ 하늘과 호흡하는/ 너의 폐부 속으로 스며들었으니”하고 한 술 더 뜬다. ‘~니 ~니 ~니’로 가쁘게 점증(漸增)하던 호흡은 끝 연에 가서 숨을 돌린다.
“숨을 내뱉어라/ 올라가서 올라가서 이제,/ 바람에 뒤척이는 꽃밭이 되어라.” 그래 놓고는, 바람 풍류 삼아 한닥한닥 몸 흔드는 완상의 꽃밭이 아니라 ‘뒤척이는’ 꽃밭이고, 눈 기셔 낳은 사생아처럼 ‘저녁’ 꽃밭이란다. 그가 박형준 시인이다.
그는 네 번째 시집 ‘춤’(창비 발행)에다 ‘물 위에 가볍게 뜬 소금쟁이’마냥 여리고 낮게 세상에 개입해서는 ‘파문’처럼 판 전체를 전율하게 만드는, ‘고통의 미묘한 발자국’(‘빛의 소묘’)같은 시 52편을 담았다. 하지만, 그가 밥 짓는 연기에서 살 타는 냄새를 맡아내는 시인이라고 하는 말은, 그를 소개하는 표현으로야 C학점 수준쯤은 되겠으나, 새 시집 ‘춤’을 소개하는 데에는 아무래도 허전하다.
표제시 ‘춤’을 보자.
“근육은 날자마자/ 고독으로 오므라든다// 날개 밑에 부풀어오르는 하늘과/ 전율 사이/ 꽃이 거기 있어서”
제목 옆에다 시인은 “첫 비행이 죽음이 될 수 있으나, 어린 송골매는 절벽의 꽃을 따는 것으로 비행 연습을 한다”는 설명을 달았다. 첫 두 연은 그러니까, 어린 송골매가 이륙하는 순간과 그 직후의 절대 고독과 절벽의 아득한 높이가 주는 전율의 느낌이다.
“살을 상상하는 동안/ 발톱이 점점 바람 무늬로 뒤덮인다/ 발 아래 움켜쥔 고독이/ 무게가 느껴지지 않아서”
제 몸이 찢어발긴 공기의 파동에 굳은 발톱조차 바람 무늬로 물결 질 정도라니 비행은 성공이다.
“상공에 날개를 활짝 펴고/ 외침이 절해를 찢어놓으며/ 서녘 하늘에 날라다 퍼낸 꽃물이 몇동이일까” 그 어린 송골매의 어미 아비, 의 어미 아비의 어미 아비도 있었음이다. 그 뿐이랴. “천길 절벽 아래/ 꽃파도가 인다” 언제가 됐든, 자신 역시 절벽 기슭에 늙은 몸 풀어놓고 제 새끼가 추어내는 사생결단의 ‘춤’을 지켜보리라.
시집에는 물론 ‘살 타는 냄새’ 말고도 ‘늙은 청소부’도 등장하고, ‘보퉁이를 손에 꼭 그러지고/ 서울역 광장 역처마에’ 선 노인도 나오고, 노부부의 ‘낡은 리어카’도, 기차에서 뛰어내려 거적때기에 덮인 ‘주검’도 있다. 그간 시인이 집요하게 발붙여 섰던 고단한 일상의 풍경들이다.
하지만 ‘춤’에서 맞닥뜨린 세계는 일상의 자잘함을 탈각한, 도도하리 만치 고고하고 치열한 정신의 공간으로 여겨진다. ‘구관조’ 등의 몇몇 시들에서 엿보이는 약간의 낯섦도, 이 ‘춤’으로 하여 다시 돌아보게 될 정도다. 조금 억지를 부리자면, ‘얼음 계곡’도 ‘춤’과 한 데 묶일 법한 시다. 시에서 시인은, 젊은 날, ‘碇泊(정박)의 거대한 나무가 될 수 있을 것 같은’ 꿈의 오솔길과, 산정 얼음 속에 정을 박고 날개를 캐낼 수 있을 듯한 얼음 계곡 길을 두고 선택의 고민을 했지만 돌이켜보니 끝내 두 길 모두 가지 못했다고 한다. 하며, 돌이켜 보니 그 선택적 고민의 순간부터 갈림길 응달에 묻힌 채 “구더기떼가 전신에 알을 낳고 있었다고,/…/중년으로 접어들고 있었다’고 탄한다. 그 한탄이 ‘춤’을 노래한 올해 갓 마흔인 시인 자신의 것인지 어떤지는 모를 일이나, 아무렴 어떤가. 시인도 때로는 한숨 폭폭 쉬며 대책 없이 퍼져 앉을 권리가, 자유가 있지 않겠는가.
최윤필기자 walde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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