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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민들레의 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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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민들레의 계절

입력
2005.05.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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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들레가 지고 있다. 샛노란, 또는 새하얀 맑은 꽃들이 사라진 자리에서 자라난 씨방은 어느새 크게 벌어졌고, 공처럼 부풀어 흰 깃털을 드러낸 씨앗이 바람에 날리고 있다.

은사시나무나 버드나무 씨처럼 구석진 곳까지 떠밀려 와 수북이 쌓인다. 싹 트고, 꽃 핀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무수한 분신을 떠나 보내고 있다. 얼마 전까지 땅에서 피었다가, 이제 하늘로 번지며 내년 봄 더욱 넓어진 민들레의 영토를 예언한다. ‘땅에서 하늘에서 다시 피는 민들레’(이해인 ‘민들레’에서)이기를 다짐하는 듯하다.

■바람을 타고 날아가 땅에 내린 씨앗은 서둘러 싹과 뿌리를 낸다. 새잎 가득 햇볕을 빨아 당겨 그 힘을 뿌리로 내려보내 땅을 깊이 파고 들어간다. 추운 겨울을 그렇게 견딘 뿌리는 봄이면 잎을 피워 올린다.

꽃 망울이 피기 시작하면 꽃대를 곧추 세워 태양을 맞는다. 해가 지거나 흐린 날이면 몸을 웅크리듯 꽃을 닫는다. 수분이 끝나 꽃잎이 지면 씨방을 매단 줄기를 조심스럽게 땅바닥으로 내려 놓고 안전하게 씨앗을 키운다. 씨가 다 자라 떠날 때가 되면 줄기를 높게 뻗쳐 조금이라도 씨앗이 멀리 날아가게 한다.

■흔히 말하는 민들레의 지혜다. 어찌 보면 민들레는 도시의 꽃이다. 시골의 들판 가득히 피어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도시의 보도 블록이나 담벼락 틈, 아파트 화단의 한 귀퉁이에서 모질게 피어야 비로소 무심한 눈길을 잡는다. 앙증맞고 예쁜 꽃은 자로 잰 듯 정확한 짜임새를 하고 있다.

밟혀서 상처를 입고, 독하게 쓴 흰 피를 흘리다가도 이내 되살아 난다. 쓰고 독해서 벌레도 입을 대지 않는다. 우선은 써도 뒷맛이 달짝지근한 씀바귀가 마구 벌레들에 뜯기는 것과는 영 딴판이다. 도대체가 촌스럽지가 않다.

■끈질기고 억척스러운 모습이 옛 어른들을 보는 것 같아 정겹다가도 문득 정나미가 떨어진다. 끝을 짐작할 수 없는 악착스러움을 보는 듯해서다. 꽃밭의 화초는 화려하고 약해서 아름답지만 야생화는 끈질기고 소박해서 아름답다. 세상도, 사람도 같다. 당장 살아 남는 것이 힘겨울 때 들풀처럼, 민들레처럼 질긴 모습은 아름다웠다.

그러나 고난의 시절을 다 거치고서도 악착 같은 근성만은 끝내 버리지 못하는 모습은 추하다. 그들은 이제 민들레가 아니고, 우리의 막연한 민들레 사랑도 끝낼 때다. 민들레의 계절이 가고 있다.

황영식 논설위원 yshw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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