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자존심’인 제너럴모터스(GM)와 포드의 신용등급 추락, 뒤이은 도요타의 발빠른 움직임은 주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GMㆍ포드의 회사채 신용이 투자부적격인 정크본드 등급으로 추락하자 세계가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자동차업계는 미국산 자동차의 품질 저하와 고비용 구조에 따른 불가피한 결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였다. 자동차 전문가들과 월 스트리트의 투자 전문가들은 세계 자동차산업의 재편 가능성을 분석하기에 바빴다.
GMㆍ포드의 추락을 도요타와 현대 등 아시아 자동차의 대약진 때문으로 보는가 하면 앞으로 아시아 자동차가 미국시장을 장악할 것이라는 ‘황화론(黃禍論)’까지 고개를 들었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도요타가 올 1~3월 461억달러의 매출을 기록, 부동의 1위 GM을 제쳤다는 뉴스가 전해졌다. 2003년 포드를 제치고 2위로 올라선 도요타가 불과 1년 만에 세계 자동차업계의 정상을 차지한 것이다.
현대자동차(기아자동차 제외)도 61억달러의 매출로 사상처음 10위에 진입하는데 성공했다. 10대 자동차메이커의 지역분포가 미국 2개, 아시아와 유럽이 각각 4개인 것을 보면 미국이 충격을 받을 만하다.
GMㆍ포드의 추락과 도요타의 정상 정복, 아시아 자동차의 도약을 어떻게 볼 것인가. 자동차산업 서진(西進)의 결과로 중심축이 일본과 한국으로 이동했다는 신호인가. 유럽 미국 동북아의 3극체제가 형성된 것은 사실이나 중심축이 동북아로 옮겨졌다고 판단하기는 이르다. 무엇보다 세계 자동차시장을 지배하는 자동차 메이저들이 결코 자동차산업의 서진이 계속 진행되는 것을 원치 않고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자동차산업의 서진이 계속 진행된다면 자동차산업의 중심은 일본 한국을 지나 중국 인도, 즉 친디아(Chindia)로 넘어가게 돼있다.
거대한 내수시장과 가격경쟁력을 갖춘 이들 국가가 자동차산업의 중심지가 되면 기존 자동차 메이저들은 설 땅이 없어진다. 첨단기술을 무기로 고급차 시장은 지킬 수 있을지는 몰라도 대중차 시장을 잃고서 자동차강국이 될 수는 없다.
도요타의 대응을 지켜보면 자동차 메이저들의 이런 속내를 읽을 수 있다. 도요타는 미국 자동차의 몰락을 막기 위해 자사 차량의 가격 인상을 고려하는 한편 GM과 연료전지차를 공동 연구ㆍ개발키로 합의했다. 미국시장을 장악할 수 있는 기회에 이런 우호적 제스처를 취하는 도요타의 전략은 치밀한 상황 분석의 결과로밖에 해석할 수 없다.
미국의 토종 자동차회사가 망한 뒤 일본 자동차는 대접 받기는커녕 배척의 대상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본 것이다. 오히려 극단적 반일 감정을 초래, 자동차는 물론 일본 제품 전반에 대한 불매운동까지 우려했을 수도 있다. 차라리 자동차 강국인 미국과 손잡고 패권을 형성하는 게 세계 자동차시장 지배에 더 효과적이란 판단은 쉽게 나올 수 있다.
이는 자동차산업의 서진을 멈추게 하거나, 적어도 지연시킬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다. 미국 자동차산업이 살아야 중국과 인도가 자동차 공룡으로 부상하는 것을 저지할 수 있다. 결국 자동차산업에도 경제패권주의가 엄연히 존재함을 보여준다. 도요타와 GM의 협력은 제3의 세력을 키워서는 안 된다는 암묵적 합의에서 나온 전략인 셈이다.
한국 자동차산업은 세계가 그 비약적 발전을 칭찬하지만 사실 새로운 도전을 맞고 있다. 일본 자동차와 함께 경계의 대상으로 취급 받고 있고 한국 자동차의 명성에 상당한 거품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우리 자동차업계 스스로 세계 일류 자동차기업과의 격차를 잘 알고 있다.
우쭐해서 자동차 메이저들과 무모한 싸움을 벌이다가 공동의 적으로 내몰릴 경우도 배제할 수 없다. 괜히 경쟁자를 자극하고 시장을 긴장시킬 필요가 없다. 조용히 기술격차를 좁혀가면서 후발주자를 따돌리고 선두그룹에 슬그머니 합류하는 전략이 필요한 때다.
방민준 논설위원실장 mjbang@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