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 진화론을 신봉하고, 그 진화의 궤적과 지향을 일찌감치 감지한 듯한, 해서 세상의 온통 ‘잡(雜)스러운 소설’ 판에 몸을 두고 패관(稗官)의 역을 외롭게 감당해 온 박상륭씨는 새 창작집 ‘小說法(소설법)’ 한 자락에 이렇게 적었다.
“허긴, 우리 모두는 미숙한 파르지발이다. 불알을 제 손 안에 쥐고서, 그것을 찾겠다고 저자거리를 헤매는 식이다. 우리 모두는 빙충맞다.” 하니, 그의 소설 쓰기는, 어쩌면, 이 ‘빙충맞은 파르지발’들의 우매함을 깨우쳐 제대로 된 정신 진화의 길로 인도하려는, 메시아적 충정 혹은 안타까움의 발로라 봐도 무방할 것이다.
책은, 장자가 남긴 남화경(南華經)이라는 책의 구성법을 따랐다는 바, ‘내-외-잡’의 3편에 각 편마다 안긴 3-4-2편의 글로 채워졌다. 내편이 작가의 종교ㆍ철학적 사유를 압축한 글이라면, 외편과 잡편은 그 외연을 확장하고 사례들을 통해 구체화한 글이다.
내용을 도식화하자면, 내편 첫 글인 ‘無所有(무소유)’는 인류가 묶여 맴돌고 있는 정신 진화의 현 단계를 보여준다. 그에 따르면, 이 가르침은 동양의 한 종교(자이나교)에서 비롯했다는데, 현생 인류는 존재와 초월자(우주)의 이분화 단계를 넘어 자신에게 내재한 우주를 들여다보게 된 ‘판켄드리야’의 단계에 있다고 한다.
존재로서의 ‘것’과 그 ‘것’을 규정하는 환경으로서의 ‘곳’이 통합된 ‘??작가의 造語)’의 내면화 단계인 셈이다. 작가는 로마군인 롱기누스의 창에 치부를 찔려 성불구가 된 어부왕(곧 예수)과, 그 시동(侍童)의 이야기를 패관의 입을 빌어 전한다.
모든 병을 치유해준다는 ‘성배’를 지녔음에도 자신의 상처는 어쩌지 못하는 어부왕을 위해 시동은, 성배의 잠을 깨워줄 무엇을 찾아 길을 떠나지만, 길을 잃고 죽는다는 내용이다.
이 시동이 곧, 내재하는 것을 못 보고 바깥을 싸도는 ‘미숙한 파르지발’인 셈이다. 작가가 말한 무소유는 “소유한 것이 없다는 ‘무, 소유’가 아니라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의 ‘무소, 유’”임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는 말이다.
내편 두 번째 글인 ‘소설법’도 ‘소설, 법’이기 보다는 ‘소, 설법’처럼 읽힌다. 작가는 기승전결의 네 형식으로, 각기 서양 동화며 신화를 두고 그의 종교적 철학적 사유를 전개한다. 가령 기(起) 단락은 작가가 모든 판타지 서사의 모태라고 말하는 ‘잠자는 공주’ 이야기를 통해 판타지, 특히 신종(변형) 판타지들의 패악성을 경계하고 있다.
“이 아름다운 공주가 ‘검은 상복의 과부거미’로 그 계모성을 드러내는 것도, 지적하지 않을 수가 없는데, 그 ‘아름다움이나 지선’함에 찬양을 보내다보면, 주변 국가 민족들은, 알게도 모르게도, ‘문화적 피식민화’또는 ‘상상력의 피식민화’라는, 결코 바람직하지 않은 결과에 봉착하게 될 것이어서….”
그에게 이 신종 판타지들의 패악은 정신 진화를 방해하고, 오히려 역진화를 조장하거나 할 수 있는 위험 요소다. 그의 이야기를 헐떡거리며 좇아가다 보면 ‘소, 설법’이 곧 그의 ‘소설, 법’에 닿아 있음도 어렵사리 깨닫게 된다.
본인은 인정하지 않겠지만, 생경한 개념들과 조어에 가까운 단어며 표현들로 하여 소설 읽기의 고통스러움을 체감케 해온 작가다. 해도, 거친 듯 어지러운 듯 풀어놓은 문장 속 어휘들의 정교한 배열이나 시적인 울림은, 적으나마 광(狂)적인 팬들을 거느리게 하는 그 만의 힘이다.
다행히 이번 책에는 ‘내편-무소유’처럼, 고향집 노친네가 불쏘시개로 화로불 끼적거리며 옛 얘기 하듯 구시렁구시렁 풀어놓은 듯한 느낌의 글도 있고, ‘내편-역증가’처럼 대화극 형식으로 비교적 단정하게 차려 입은 글도 있고, 외편 잡편의 주석(註釋) 같은 글들도 있어 조금은 편히 읽힐 듯하다.
최윤필기자 walde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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