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그러더군요. 사람들이 죽어 널부러져 있는 것도 눈에 뵈지 않았다고…. 흰띠를 두른 철모자를 쓴 군인들이 엄마를 개머리판으로 골목으로 밀쳐내며 집으로 들어가라고 해도 엄마는 그랬대요. 우리 아들 찾으러 왔다고…."
1980년 광주 민주화운동 당시 아들을 구하겠다는 모정 하나로 유혈이 낭자한 광주시내에 걸어서 들어가 결국은 아들을 구해 3일만에 집으로 돌아온 한 시골 어머니의 감동적인 일화가 공개돼 화제를 모으고 있다.
당시 초등학생이었다는 한 여성 네티즌이 자신의 어머니 이야기라면서 모 포털사이트 토론방에 올린 이 이야기는 4만5,000여건이 넘는 조회수를 기록하며 네티즌들의 가슴을 감동으로 물들이고 있다.
논에서 일하다 동네 아저씨로부터 광주에 '전쟁'이 발생해 학생들을 다 죽어나가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이 어머니는 광주에서 하숙을 하고 있는 아들을 구해오기 위해 곧장 땀에 흠뻑 젖은 속옷에 얇은 블라우스를 걸친 채 택시를 탔다.
교통 통제로 차를 타고 시내에 들어갈 수 없었던 어머니는 광주시 외곽에서 하차한 후 슬리퍼를 신은 몸으로 백운동까지 걸어갔다.
이 네티즌은 "시내를 가로질러야 하는데 얼마나 멀었겠느냐"면서 철모를 쓴 군인들이 어머니를 개머리판으로 밀쳐내며 집으로 돌아가라고 위협했는데도 어머니는 '아들을 찾으러 왔다'면서 굴하지 않았았다고 말했다.
모진 고생 끝에 만난 아들은 다른 학생들과 함께 하숙집 지하실에 갇혀 있었다. 하숙집 주인이 고등학교 선생님이었는데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것을 목격한 학생들이 거리로 뛰쳐나가려고 하길래 겨우 붙잡아서 가둬놓았다는 것.
이 네티즌은 "어머니는 계속해서 밖으로 뛰쳐나가려 하는 오빠의 허리춤을 뒤에서 잡고 질질질 끌고 처음 왔던 것처럼 다시 외곽까지 걸어나와서 3일만에 집으로 돌아왔다"고 말했다.
그는 "군용트럭이 수없이 지나가고 도로에 피가 뚝뚝 떨어져 있고…. 물로 ??爭뼉?못한 그 아픈 기억들이 엄마를 많이 괴롭혔던 것으로 기억한다"면서 어머니가 5월 광주의 처참한 기억 때문에 한동안 힘들어했다고 밝혔다. 그는 "결국 엄마는 환영처럼 사라지는 그 사람들의 죽은 모습을 머리 속에 가지고 일찍 가셨다"라고 회고했다.
"5월이 되어 최루탄 가스에 눈물 콧물이 범벅이 돼도 한 번도 시위대 언니·오빠들을 원망하진 않았다"는 그는 "아카시아 향기가 최루탄가스에 묻혀버렸어도 그 가슴맺힌 사진 한 컷 한 컷은 지금도 생생하다"고 말했다.
그는 "총에 얼굴을 맞아 왼쪽이 완전히 없어져 버린 아저씨와 검게 탄 학생. 퉁퉁 불어 눈조차 뜰 수없는 교복입은 언니. 그 한 컷 한 컷 사진을 보면서 사람이라면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라고 글을 맺었다.
다음은 '기억나죠.. 생생하게'라는 제목의 글 전문이다.
모내기 철이였죠. 80년 5월은.. 시골서 공부잘한다고 큰아들 도시로 유학을 보내고 부모님들은 80년 5월도 여느해와 마찬가지로 들에 나가셨구요. (참고로 전 그때 국민학생이었죠.) 엄마가 점심밥 먹으로 집으로 달려온 저를 붙잡고 광주간다고 하시더군요.. 따라간다고 엄마 따라간다고 울며 불며 나선길이었는데.. 평소에 외출하는 엄마모습이 아니였습니다.
몸빼(작업복이죠)에 덕지덕지 붙은 흙조차 털어낼 여유도 없이.. 땀에 흠뻑젖은 속옷위에 얇은 블라우스걸치고는 슬리퍼 차림으로 택시를 타고 가셨습니다. 그리곤.. 삼일만에 다시 택시를 타고 큰오빠와 함께 시골집에 오셨더군요.. 놀랬어요.. 정말.. 큰오빠는 얼굴이 무척 놀란표정으로 멍해 있었고.. 엄마도 큰오빠 못지 않게 멍하시더군요.
나중에야 알았지요... 광주에서 전쟁이 난걸...(국민학생의 생각)
우연히 엄마는 논에 나갔다가 그 소식을 들은거죠. 광주에 일보러 가셨던 동네 아저씨가 광주에 전쟁이 나서 학생이고 군인이고 다 죽인다고.. 그 아저씨도 사람죽은 걸 봤다고.. 차도 안다니고.. 제 기억으론 나주어딘가 남광주 어딘가.. 서방이라고 한거 같기도 하고.. 아무튼 광주외곽까지 걸어나와서 차얻어타고 간신히 왔다고.. 난리났다고...
그래서..엄마는 학생이고 군인이고 소리에 큰아들 잡으러 간다고 광주에 그 몸빼차림으로 나선거였구요.. 엄마도 그 아저씨랑 다를바 없이 광주외곽까지 택시타고 갔대요.. 시내진입은 못하고.. 그래서 걸어서 광주 백운동까지 걸어갔답니다. 얼마나 멀었겠습니까? 시내를 가로질러야 하는데... 그 모정 하나로 아들을 찾아나선 엄마의 집념도 집념이지만.. 엄마는 그러더군요.. 사람들이 죽어 널부러져 있는것도 눈에 뵈지도 않았다고.. 흰띠를 두른 철모자를 쓴 군인들이 엄마를 개머리판으로 골목으로 밀쳐내며 집으로 들어가라고 해도 엄마는 그랬대요. 우리아들 찾으러 왔다고.. (그 군인이 엄마를 보더니 조심히 돌아다니라고 했다고 하더군요.)
큰오빠가 하숙하는 집을 찾아갔는데.. 큰오빠는 없었대요. 그 하숙집 주인이 광주일고인가 하는 선생님이라고 들었는데.. 그 하숙집 주인아저씨 (선생님)가 지하실로 엄마를 데리고 가더래요. 가보니까 오빠랑 몇몇 하숙생들이 교련복차림으로 츄리닝차림으로 갇혀있었답니다. 왜 갇아놨냐고하니까 선생님이 그러셨대요..
사람들이 죽어가는걸 보고 아이들이 뛰쳐나갈려고 하고 또 한 애는 이미 총을 들고 트럭을 타고 다니는걸 겨우 잡아다가 갇아놨다고..아직 어린데..
그래서 제 큰오빠는 광주항쟁때 살아있었습니다.
오빠친구들도 많이 죽었다고 하더군요.. 교련복차림이건 교복차림이건 무조건 곤봉으로 내리치고..
엄마는 오지 않고 밖으로 뛰쳐나갈려는 오빠 허리춤을 뒤에서 잡고(이러면 천하장사도 힘 못씁니다.) 질질질 끌고 처음 왔던 것처럼 다시 외곽까지 걸어나왔다고 하더군요. 군용트럭이 수없이 지나가고.. 도로에 피가 뚝뚝 떨어져 있고..미쳐 물로 ??爭뼉?못한 그 아픈 기억들이 엄마를 많이 괴롭혔던걸로 기억합니다.
엄마는 환영처럼 사라지는 그 사람들의 죽은 모습을 머리속에 가지고 일찍 가셨지요.. 시간이 지나 저도 광주로 유학을 했습니다. 5월이 되면 최루탄 가스에 눈물 콧물이 범벅이 되었어도 한번도 그 시위대 언니오빠들을 원망하진 않았습니다. 다만 나이가 어려..아직 학생이여서 같이 동참못하는 부분이 아쉬웠을뿐...
아카시 향기가 최루탄가스에 묻혀버렸어도 그 가슴맺힌 사진한컷한컷은 지금도 생생합니다.
남광주역과 전대병원 사이에 철길이있었죠..(그때) 그 쪽으로 일부러 걸어서 다닙니다. 5월이 아니더라도 5.18 사진은 항상 있었죠.. 총에 얼굴을 맞아 왼쪽이 완전히 없어져 버린 아저씨와..검게 탄 학생. 퉁퉁 불어 눈조차 뜰수없는 교복입은 언니. 그 한컷한컷 사진을 보면서 사람이라면 분노하지 않을수 없었을 것입니다. 나와는 동떨어진 세계가 아닌 나와 같은 사람인데...
아무튼...
5.18 광주항쟁은 지금도 저에게 항상 새로운 분노를 심어줍니다.
더 열심히 살아서 더 열심히 노력해서 다시는 어리석은 자가 국민의 대표가 되지 않기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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