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반기업 정서’가 자주 거론되고 있다. 기업과 재계 단체는 반기업 정서 때문에 기업 활동과 투자가 위축되고 종국에는 경제 발전에 걸림돌이 된다고 목청을 높인다. 반기업 정서의 한 가운데는 이른바 ‘재벌’로 불리는 대기업 집단들이 있다. 그중에서도 삼성그룹과 이건희 회장은 가장 많이 거론되는 대상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삼성과 이 회장은 반기업 정서의 중심인 동시에 반기업 정서의 최대 피해자라 할 수 있다. 자신들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반기업 정서의 원인을 제공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그로 인한 불이익도 고스란히 받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4일 고려대에서 삼성과 이 회장이 봉변을 당했다. 대부분 언론이 뿌리깊은 반기업 정서를 지적하며, 삼성과 이 회장이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는 풍토를 아쉬워했다. 그룹 총수가 난무하는 반삼성 구호 속에 경호원들의 보호를 받으며 황급히 사라지는 모습을 현장에서 지켜본 삼성 임원들은 "기업은 변했는데 학생들은 20년전 그대로다" "해외는 초일류 대접을 하는데 국내의 대접이 고작 이 정도냐"며 격한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이 회장 자신도 지난 1월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직을 고사하는 세 가지 이유중 하나로 반기업 정서를 들었을 정도니, 삼성과 이 회장에게 우리 사회 일각의 반기업 정서가 마뜩지 않은 존재인 것만은 틀림없는 것 같다.
기업은 소유·경영·지배 구조가 형성하는 ‘3각 편대’가 지탱한다. 대주주와 소액주주를 포함해 소유 분포가 어떻게 돼있는지, 기업이익과 새로운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경영활동은 어떻게 이뤄지는지, 최고 의사 결정은 어떤 절차를 거쳐 누가 내리는지에 따라 기업의 선진성 여부를 가늠해볼 수 있다. 선진 기업에서 소유 구조의 핵심은 주주다. 경영 구조의 핵심은 전문 경영인이며, 지배 구조의 정점에는 이사회가 있다. 그런 면에서 삼성은 세계 시장에서 초일류 대접을 받을 만하다. 소유 분산으로 주주 이익 극대화를 위한 경영이 이뤄지고 있고, 자율권을 가진 전문 경영인들이 사외이사가 참여하는 이사회의 최종 승인을 받아 기업을 경영하면서 매년 영업실적 기록을 갱신하고 있다.
하지만 한 겹 벗겨내면 삼성에는 선진 기업이라고 하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또 하나의 구조가 똬리를 틀고 있다. 적은 지분으로 계열사간 순환 출자 구조를 통해 그룹을 지배하고 있는 ‘1인 총수 경영’이 그것이다. 나아가 불법, 탈법 논란을 불러일으키면서까지 그런 지배력을 대물림하려 하는 데 이르러서는 글로벌 초일류 기업을 지향한다는 삼성의 구호가 무색해진다.
어디 삼성 뿐인가. 30대 대기업 집단은 물론이고 웬만한 규모의 중견 그룹들 역시 투명 경영, 윤리 경영을 다짐하고 막대한 비용을 들여 사회공헌 활동을 하면서 "20년전과 확실히 달라졌다"고 외치지만 부의 대물림 앞에서는 초라해지고 만다. 정경 유착의 검은 거래도 없어졌다지만 ‘차 떼기’ ‘채권 떼기’가 동원됐던게 불과 엊그제다.
대내외의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주주와 종업원의 이익을 추구하고, 부의 사회 환원을 실천하며, 성실 납세 의무를 다하는 기업과 기업인을 향해 반감을 가질 이는 아무도 없다. 문제는 기형적 경영 구조와 거기서 얻은 지배력을 법의 허점을 이용해 고스란히 대물림 하려는 재벌에게 있다. 기업은 변했지만 재벌은 20년전 재벌 그대로다. 반기업 정서는 그래서 ‘반재벌 정서’라 불러야 옳지 않을까.
황상진 산업부 차장 april@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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