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초등학교를 다니고 네 살 아래의 동생도 초등학교를 다닐 때였다. 내가 동생에게 묻는다. "너, 까치가 어떻게 우는지 알아?" "알아." "어떻게 우는데?" "까차 까차." "까마귀는?" "까악 까악 울지." "그럼 종다리는?" "그건 쫑알 쫑알."
어린 형제가 매일 이런 얘기를 주고받으며 산길을 걸어 학교를 다녔다. 그 산길에 참으로 많은 새들이 살았다. 솔새, 박새, 곤줄박이 등 어떤 날은 수백 마리의 산새가 어울려 온 산이 떠나가도록 지저귀곤 했다. 그때는 어려도 하늘에 새가 날아가는 모습만 보고도 저게 종달새인지 할미새인지 구분할 줄 알았다.
그 중에 우리에게 늘 목소리만 들려주지 자기 모습을 보여주는 데 아주 인색한 새가 있었다. 바로 뻐꾸기였다. 오월부터 이 산 저 산에서 숱하게 울어도 우리는 한번도 시원스러운 모습으로 뻐꾸기를 보지 못했다. 그것은 우리에게 늘 숨어서 우는 새였다.
어제 산책 길에 뻐꾸기 소리를 들었다. 정말 들었는지 환청인지 알 수가 없다. 온 숲의 나뭇가지를 다 살펴도 끝내 모습을 보지 못했다. 어릴 때나 지금이나 그 새는 내게 자신을 드러내는데 여전히 인색하기만 하다.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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