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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석재 교수의 건축, 우리의 자화상] (8) 높은 곳으로 임하시는 우리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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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석재 교수의 건축, 우리의 자화상] (8) 높은 곳으로 임하시는 우리 교회

입력
2005.05.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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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에 높은 곳에 올라가서 내려다보면 붉은 십자가와 푸른 십자가 밖에 안 보인다는 우리나라. 붉은 십자가는 교회이고 푸른 십자가는 약국이다. 교회는 정신을 고쳐주는 곳이고 약국은 몸을 고쳐주는 곳이니 우리나라 사람들은 몸과 마음 모두 아픈 사람들이 많은가보다. 이런저런 십자가에 의지하지 않고서는 살지 못하는 우리, 좋은 모습은 아니다. 우리의 교회는 과연 이렇게 기댈만한 곳인가. 약을 간식 먹듯 먹어대며 녹색 십자기의 참뜻을 손상시키듯 신통력을 앞세워 붉은 십자가 팔아먹는 장사나 하고 있지 않은가.

가톨릭과 개신교를 구분하지 말고 한 번 보자. 한국 현대사에서 기독교는 기록적인 양적 팽창을 거듭했다. 그 과정에서 힘 있는 집단에 강하게 의존했다. 서양, 정치세력, 경제력이 그것이다. 한국 현대사회를 대표하는 집단 이데올로기이자 지배 법제이다. 기독교가 각개 전투식으로 우리 사회에 펼쳤던 사랑은 이런 집단성과 지배성에 의해 빛이 바래도 한참 바랬다. 기독교는 한국 현대사의 부정적 이미지를 몽땅 갖추고 있다. 교회 건물은 이것을 잘 보여주는 예이다.

한국의 교회 건축은 세 가지 특징으로 대표된다. 서양 중세의 뾰족탑, 서양 현대양식, 대형화이다.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뾰족탑이다. 개화기 때 기독교와 함께 들어왔다. 이 양식은 1980년대까지 계속되었다. 이 양식이 한국에 뿌리를 내린 근거는 세계 보편적이라는 것이다. 기독교는 세계보편성을 지향하는 종교이고 따라서 이런 보편성을 획득한 뾰족탑의 교회 양식은 세계 어느 곳에 세워져도 무방하다는 주장이다. 아니, 무방한 정도가 아니라 반드시 그런 양식으로 세워져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보편성과 관련된 종교적 주장들은 차치하고라도 뾰족탑으로 상징되는 중세의 로마네스크나 고딕 양식이 과연 기독교를 대표하고지구를 대표하는 양식인가. 더 근본적인 질문도 있다. 한 지역에서 완성된 이런 교회 건축이 다른 지역으로 전파될 때 과연 붕어빵 찍듯이 똑같이 이식되는 것이 옳은가.

기독교가 세계 보편적 진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교회 건물도 그러해야 한다는 주장이 옳다고 치자. 이것이 타당성을 가지려면 우리의 기독교가세계 보편적 진리를 몸소 실천한다는 전제조건이 성립되어야 한다. 기독교의 세계 보편적 진리란 무엇인가. 박애이다. 우리의 기독교가 이런 기본정신을 잘 좇고 있는가. 유감스럽게도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뾰족탑을 기독교의 세계 보편적 양식이라며 받아들인 데에는 여러 원인이 있을 수 있다. 이런 주장이 사실처럼 잘못 비추어질 수 있다는 점, 우리 사회가 개화기에서 지금에 이르기까지 이런 문제에 정밀하게 몰두할만한 정신적 여유가 없었다는 점, 더 근본적으로 너무 가난해서 경황이 없던 때에 들어와서 마치 미군 군수물자 받아먹듯 어쩔 수 없이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는 점 등일 것이다. 그러나그렇게 어려웠기 때문에 오히려 더 우리 사회에 맞는 기독교 건축 양식이 무엇인지 찾으려는 치열한 고민이 있어야 했다. 이것은 장사나 정치가 아닌종교이기 때문이다.

대답은 뻔하다. 한국 현대사에서 기독교는 지배 계층이 주도했으며 이 과정에서 권력과 이익을 공고히 하는 수단으로 악용되었다. 조선 유교가 고려의 불교를 물갈이했듯이 기독교는 다시 그 뒤를 이어 20세기 한국 현대사회의 지배 종교가 되었다. 이런 지배성을 굳히는 수단으로 서구의 뾰족탑 양식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것은 곧 서구의 힘을 빌려지배 권력을 키우겠다는 정치적 전략이었다. 그 명분으로 내세운 것이 뾰족탑이 세계 보편적 진리를 상징한다는 논리였다.

능선이 살아있던 1980년대까지 뾰족탑 교회는 주로 능선 높은 곳을 차지하며 타고 앉았다. 뾰족탑은 다시 교회의 높이를 인위적으로 높여주었다. 이런 모습은 중세 유럽의 고도(古都)를 너무나 빼다 닮았다. 그 내면을 보자. 중세 유럽에서는 낮은 야산 하나가 작은 도시였고 성당은 그곳에서 제일 높은 곳에 뾰족탑을 내세우며 우뚝 솟았다. 이런 구성은 여러 겹의 지배구도를 상징했다. 발 아래 도시의 나머지 민가를 지배하고, 성 밖 영지의 농토를 지배하고, 궁극적으로는 하늘의 이미지를 내세워 지상세계를 지배하는 상징성이다. 한국 교회가 이런 모습을 닮은 것은 내면적으로 이와 동일한 지배구도를 지향했기 때문이아니었을까.

1990년대 들어 고층 아파트가 생기면서 능선이 사라지자 교회는 밀리기 시작했다. 타고 앉을 능선이 있다고 해도 아파트에게 빼앗겼다. 그 대안으로 교회는 대형화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서구의 현대 교회양식이 명품 가방 수입하듯모방되었다. 대도시에서 높이 경쟁을 하는 것은 오피스 빌딩이 아니다. 아파트와 교회이다. 서울 시내 곳곳에서 아파트와 교회는 누가 더 몸집이 큰지 경쟁하고 있다. 교회는 한국의 후기 산업사회에서 대형공간을 대표하는 건물 유형이 되었다. 교회당사자들은 자랑스럽겠지만 문화적 측면에서 보면좋은 현상은 아니다. 특히 분당 같은 부유층이 몰려 사는 신도시를 보자. 대형 교회, 대형 마트, 초고층 아파트로 꽉 차있다.

수직성이다, 선형성이다, 중앙집중형이다, 신비한빛이다, 공동체 의식이다 해서 서구 교회건축은 큰역사적 진행을 하고 있다. 지금 한국의 교회건축은이런 것들을 베끼기에 바쁘다. 뾰족탑으로 시작하며 첫단추를 잘못 꿰었지만 정작 이것을 비판한 후배 건축가들도 종류만 바뀌었을 뿐, 르 코르뷔지에의 빛 처리를 모방합네 하며 달라진 것은 별반 없다. 한국 근대건축을 대표한다는 김모씨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어버린 공동체 교회라는 것도 독일의 뵘이라는 건축가의 교회를 복사하듯 베낀 것에 불과하다.

해답이 없는 것은 아니다. 조그만 단서가 있다. 강화도 성공회 성당을 보자. 개화기 때 한옥 양식으로 세워진 성당이다. 기독교가 세계 여러 나라로 전파되는 과정에서 그 지역에 맞게 토착화한 현상의 하나이다. 교회가 한국 전통건축을 이렇게 직설적으로 모방하는것이 옳은 것은 아닐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20세기 초반에 있었던 이런 식의 노력이 단발성으로 끝났다는 데에 있다. 이런 노력이 100년을 이어져 세대를 바꿔가며 계속되었다면 지금쯤 우리는 우리 사회에 맞는 교회건축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상황은 그 반대로 나갔다. 뾰족탑만이 유일한 해답인 것처럼 번성을 누리며 이어졌다. 여기서 나온 사생아가 요즘 일고 있는 대형화와 서양양식 모방이다. 교회건축에 나타난 이런 현상은 결국 우리의 기독교 자체가 우리 상황에 맞는 모습과 역할을 찾는 데 관심이 없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증거일 뿐이다.

교회 건물은 기독교 정신의 산물이다. 사람 얼굴조차도 내적 감흥의 발로일진대 하물며 종교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지금 한국의 교회가 뾰족탑, 서구 현대양식, 대형화로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은한국의 기독교가 대외적으로는 서구에 강하게 의존하면서 대내적으로는 몸집 불리기에 혈안이 되어 변질되었다는 사실과 동의어이다. 문제는 한국현대사에서 기독교가 종교가 아니라 장사나 정치로 시작해서 그렇게 흘러왔다는 데에 있다. 주님은 낮은 데로 임하셨는데 지금 우리의 교회는 높은 데로 임하고 있다.

이화여대 건축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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