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하다
정호승
길이 끝나는 곳에 산이 있었다
산이 끝나는 곳에 길이 있었다
다시 길이 끝나는 곳에 산이 있었다
산이 끝나는 곳에 네가 있었다
무릎과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고 울고 있었다
미안하다
너를 사랑해서 미안하다
박항률(55) 화백과 정호승(55) 시인이 다시 만났다. 만나고 헤어지는 애틋한 사랑, 그 과정을 그림과 시에 섬세하게 담았다. 글과 그림이 어우러져 느낌이 더욱 애틋하고 직접적이다.
박 화백과 정 시인의 인연은 1997년부터다.
정 시인이 먼저 박 화백이 낸 시집 ‘그리울 때 너를 그린다’를 우연히 보고 ‘느낌’이 왔단다. "그림을 처음 봤을 때 ‘쿵’ 하고 바위 하나가 내 가슴 저 깊은 곳에서부터 굴러 떨어지는 소리를 냈어요. 그리고 곧 그 바위가 꽃잎이 되어 내 가슴의 또 다른 한 곳에 사뿐히 내려 앉는 느낌, 왜 그랬는지…아마 그의 그림에서 우러나오는 고요함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박 화백을 무작정 찾아갔어요."
그렇게 해서 의기투합한 두 사람이 그 해 처음 낸 공동작품이 산문집 ‘당신의 마음에 창을 달아드립니다’이다. 물론 글은 정 시인이 쓰고 박 화백이 책에 그림을 그렸다. 그 후에도 그들은 여러 차례 산문집, 동화집에서 함께 작업을 해왔다.
"이제는 서로의 작품을 보면서 또 다른 작품을 만들어요. 조각과 그림을 보면서 시를 만들고 시를 보면서 그림을 그리고… 분명 통하는 무엇인가가 있는 것이겠죠" 서로의 작품에 영향을 주고 받고있다는 두 사람, 그래서인지 그들의 공동작품은 시도, 그림도 따뜻하게 다가든다.
서울 관훈동 인사아트센터에는 11일부터 정호승 시인의 시를 모티브 삼아 박항률 화백이 그린 그림 31점이 걸린다. 10호부터 100호까지 다양한 크기다. 그림 옆에는 시가 쓰여져 있다. 이야기가 있는 그림인 셈이다. 정 시인의 시 ‘미안하다’의 마지막 싯귀를 전시회 이름으로 삼았다.
큰 눈을 가진 단발머리 여인을 클로즈업한 50호짜리 그림 ‘눈부처’. 그녀는 슬픔에 찬 눈으로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다. 눈이 한없이 투명하고 고요하다. 턱을 괴고 앉아 있는 여인, 넋 놓고 꽃을 바라보고 있다. 시름에 가득한 얼굴이 창백해 보이기까지 한다. 옆에 쓰인 ‘너를 사랑해서 미안하다’란 글귀가 힌트를 준다. ‘기다림’, ‘그리움’, ‘ 이별’, ‘만남’, ‘추억’, ‘후회’, ‘비밀이야기’ 등 사랑하면서 느끼는 감정들은 모조리 모아 놓았다. 박 화백은 "사랑이란 우리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소재지만, 그 동안 제 작품세계에서는 다루지 않았던 소재"라며 "그래서 이제까지 제가 한 작업과는 다른 또 다른 느낌의 작품들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에 전시되는 그림 31점과 정씨의 시 80편이 어우러진 시화선집 ‘너를 사랑해서 미안하다’도 이미 출간됐으며 전시 기간인 14일 오후 3시와 20일 오후 4시에는 인사아트센터와 안양교보문고에서 각각 두 작가의 공개 좌담회도 연다.
세종대 교수로 재직중인 박 화백은 인간의 고요한 내면세계를 표현하는 그림들로 국내외 개인전과 초대전을 가졌고 ‘그리울 때 너를 그린다’ 등 시집도 발표한 바 있다. 정 시인은 ‘슬픔이 기쁨에게’, ‘별들은 따뜻하다’,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등의 시집을 발표하고 소원시문학상과 동서문학상, 정지용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전시는 17일까지. 20일~31일은 안양교보문고에서 이어 전시한다. (02)736-1020.
조윤정기자 yjch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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