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전 공산주의자들의 완벽한 승리로 끝난 베트남 전쟁은 미국 역사에서 가장 길고 가장 비싼 대가를 치른 전쟁이었다.
전통적인 군사적 기준으로 평가한다면 미국은 베트남전에서 반드시 승리했어야 했다.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에 사용한 양과 맞먹는 1,500만 톤의 탄약을 쏟아 붓는 등 모든 군사적 측면에서 베트남보다 월등했지만 결국 패배했다. 사이공의 응우옌 반 티에우 장군이 이끄는 군대 역시 호치민의 군대보다 강력했다. 1975년 초만 해도 베트남 공산당 지도부는 전쟁이 10년 이상 지속될 것으로 내다봤다. 하지만 1973년 말 남베트남(월남)에 머물렀던 나는 공산주의자들의 승리를 예감하고 있었다. 나는 사이공 정부의 전복으로 중국의 국공합작처럼 큰 희생 없이 전쟁이 끝날 것이라고 베트남 공산당에게 말했다. 훗날 당시의 정치국 멤버들은 내 예견을 ‘정신 나간’ 전망으로 치부했다고 털어놓았다. 그들은 한 국가를 운영할 준비가 전혀 돼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75년 이후 계속된 지리멸렬한 정치경제 상황은 이를 충분히 반증했다.
전쟁에 관한 한 미국과 공산주의자들은 똑같이 근시안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정치·사회·경제 분야에서 일어나는 일이 군사적인 힘의 균형보다 훨씬 중요하다는 사실을 모두 간과한 것이다. 이 사실은 1975년의 베트남 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이라크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70년대 초 남베트남은 미국의 원조로 이루어진 인공 도시였다. 남베트남의 티에우 장군은 주민들의 희생을 대가로 군부와 관료의 이익을 보장해줌으로써 이들의 지지를 얻었다. 이 때문에 대부분의 베트남 국민은 그들이 공산주의에 반대하든 아니든 자신들의 재산을 약탈해가는 티에우 정권에 조금의 충성심도 보이지 않았다. 혹독한 인플레이션 탓에 군인들의 월급은 갈수록 줄어들었고 도시 중산층의 삶 역시 눈에 띄게 피폐해졌다. 당시 티에우 정권은 3만2,000여명의 정치범을 감금했고 일부 기록은 이보다 훨씬 많았다고 적고 있다.
75년초 남베트남 정권은 경제 정치 분야에 이어 군사적으로도 분열되기 시작했다. 사이공 군대는 공산당의 대공세를 앞두고 전투를 포기하는 일이 속출했다. 게다가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사임한 닉슨 대통령의 뒤를 이은 포드 대통령은 파산한 것이나 다름없는 티에우 정권을 도와줄 의사가 없었다. 여기에다 전쟁을 재개하기에 미국의 사기 저하는 심각했다.
워싱턴은 대(對) 베트남 외교전략에 맞서는 국가나 적에게는 무력 사용도 불사하겠다고 협박함으로써 모스크바와 베이징의 동의를 얻었다고 믿었다. 실제로 미국이 바란 대로 하노이의 옛 우방들이 베트남 공산주의자에 대한 원조를 중단했지만, 전쟁에 아무 영향도 끼치지 못했다. 근본적인 문제는 사이공 내부에 있었다. 사이공 정권은 급속히 분열되고 있었고 공산주의자들은 압도적인 군사력을 갖춘 사이공 군대에 맞서 거둔 빠르고 전면적인 승리에 스스로 놀라고 있었다. 사이공 군대는 이미 전투를 포기한 채 내부적으로 급격하게 붕괴되고 있었다.
결국 1945년 이후 미국이 가장 공들였던 외교정책은 실패로 돌아갔다. 오늘날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정책에 있어서도 베트남전과 마찬가지로 수많은 논란이 존재한다. 교훈은 간단하다. 베트남전의 완벽한 패배는 미국에게 전쟁이란 가장 강력한 국가조차 엄청난 희생을 치러야 너무나 복잡한 일임을 알게 되는 경고가 됐어야 했다. 전쟁은 단순히 화력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정치, 이데올로기, 경제적인 도전과도 맞닥뜨려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30년 전 베트남 전쟁은 이 사실을 증명했어야 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가브리엘 콜코 캐나다 요크대 교수·역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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