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스팔트 위로 솜뭉치가 굴러다닌다. 절정의 봄꽃을 피웠던 나무와 풀이 퍼뜨린 홀씨들이 제 몸 받아 줄 안착지를 찾지 못해서다. 바람에 휩쓸려 뒹굴 뒹굴, 홀씨는 저들끼리 얽혀 몸집만 불려 댄다. 꽃씨하나 뉘일 데 없는 도시는, 점차 메말라 가지만 자연의 산하는 지금 생명의 붓질로 촉촉하다. 초록이 익어가는 오월. 신록의 향연을 좇아 경북 상주를 찾았다.
상주시 남장마을은 곶감으로 유명한 곳이다. 가을이면 꾸덕꾸덕 말라가는 감들로 마을은 온통 빨갛게 달아오른다. 마을에서 2~3분 거리인 남장사 주차장에 차를 대고 올랐다. 좁은 계곡을 건너 고개를 드니 저 앞이 일주문이다. 문 까지는 비록 길이는 짧지만 그 흙길이 주는 인상은 강렬했다. 하늘을 가린 나무 터널, 그 나무를 두르고 있는 ‘아기 초록’의 싱그러움. 온통 연둣빛이다. 가만히 서 있으려니 초록이 휘감는다. 발길에 차이는 솔방울도, 졸졸졸 흐르는 계곡물도 초록이다.
단청이 벗겨진, 잘 생긴 일주문은 고풍 그득하다. 보통의 일주문과 달리 기둥에는 활처럼 휜 또 다른 기둥이 2개 씩 덧대져 버티고 있다. 휘어진 나무를 고여 중앙을 받친 ‘활주’로 그 머리 부분은 모두 용의 모양이다.
범종루를 지나 계단을 오르니 극락전 뜨락이다. 푸른 잔디가 깔린 마당은 주위를 둘러싼 꽃으로 눈부시다. 일견 어색한듯한 조경이지만 덕택에 더욱 정겹다.
한 층 더 오르면 보물 제990호 비로자나철불좌상과 922호 목각탱이 모셔져 있는 보광전이다. 보광전 뒤의 돌계단은 걸터 앉아 봄의 나른함을 만끽하기에 그만이다. 신록의 바람이 울려대는 풍경 소리가 고즈넉하다.
상주의 최고(最古) 사찰이라는 남장사를 들렀다면 이 곳 최고(最高)의 경승이라는 경천대(擎天臺)를 빼 놓을 수 없다. 깎아지른 절벽, 굽이쳐 흐르는 강물, 우거진 노송 등 천혜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곳이다. 하늘이 만들었다고 해 자천대(自天臺)라고도 한다.
경천대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 까지는 300여 개 되는 목조 계단을 올라야 한다. 늘어선 돌탑들로 담을 두른 계단길은 절반이 황토 바닥의 발맛사지 코스다. 봄소풍 나온 유치원생들이 맨발로 황토길에 뛰어 들었다. 어기적 어기적. 여섯 살 아이의 걸음새가 영락없이 80대 촌로의 그것이다.
전망대에 섰다. 돌로 지은 3층짜리 팔각정이다. 건물은 볼품 없지만 경치는 그만이다. 낙동강이 커다랗게 굽이친다. 안동 하회나 예천 회룡포의 물길이 부드럽게 감싼다면 이 곳은 힘이 넘쳐 휘몰이 장단으로 흐른다. 강 건너 중동면 회상들판은 봄볕으로 한껏 에너지를 충전시키는 중이다. 모내기 철이 머지 않았다.
전망대 아래로 10여분 내려가면 낙동강 1,300리 물길중 가장 경치가 빼어나다는 경천대다. 벼랑 위로 바위가 기묘한 모양으로 올라서 있다. 전망대 보다는 멀리 보이지 않지만 바로 눈앞 절벽에서 휘감겨 돌아가는 시퍼런 강물이 이마를 식혀준다.
바로 옆은 큰 멋 들이지 않은 정자, ‘무우정’이다. 병자호란때 소현세자가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갈 때 동행했던 우담 채득기 선생이 만년에 은거했던 곳이다.
드라마 ‘상도’ 세트장으로 이어지는 솔숲 산책로는 조용하고 아늑하다. 강을 굽어 보는 벤치에 앉아 가슴과 머릿속 호흡을 고르고 있으니 건너편에서 트랙터 소리가 들려왔다. 봄 가운 가득한 대기를 뚫고 오는 규칙적 기계음이 음악으로 들린다. 나뭇잎 스치는 바람처럼 부드러웠다.
남장사와 경천대 모두 입장료는 없다. 단, 경천대는 주차비로 승용차 2,000원을 받는다. 경천대 관리사무소 (054)536-7040
상주=글·사진 이성원기자 sungwon@hk.co.kr
■ 가구당 평균 2대 보유 ‘자전거 도시’
●하얀 쌀과 곶감, 누에가 유명해 '삼백(三白)의 고장'으로 불리는 경북 상주시. 요즘은 이보다 '자전거 도시'란 이름으로 더 유명해졌다. 시 전체가 평평한 분지 지형으로 최고 경사도가 5도를 넘지 않아 자전거 타기에 제격이다. 가구당 평균 2대(전국 평균 0.5대)의 자전거를 보유하고 있고 자전거의 수송 분담률도 20%(전국 2.4%)에 육박하는 등 자전거 타기가 생활화한 곳이다. ●이 곳 남장마을에는 상주시의 자전거 사랑을 기념하는 '자전거 박물관'이 있다. 옛 남장분교 운동장에 지어진 자전거 바퀴 모양의 건물이다. 목마에 바퀴를 달아 페달 없이 땅을 치며 나아가는 세계 최초 자전거인 '드라이지네(1813년)', 첫 페달식 자전거인 '맥밀런자전거(1893년)', 의류 상표 '빈폴'로 눈에 익은 '오디너리(1870년)' 등 초기 자전거들이 전시돼 있다. 또 축구공자전거, 원숭이자전거, 외발자전거, 3층·5층 자전거 등 이색 자전거들도 눈길을 끈다. ●박물과 앞에는 자전거 100여대가 비치돼 있다. 무료로 빌려 타고 남장마을이나 남장사 등을 둘러볼 수 있다. 박물관 입장료도 거저다. (054)534-4973
상주=이성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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