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 북한 핵문제의 전개과정을 좌우할 핵심 요소 가운데 하나는 미국의 힘이다. 중동지역에서 테러와의 전쟁을 수행하면서, 동시에 북한과 이란을 대상으로 대량살상무기(WMD)와의 전쟁을 치를 파워가 있느냐는 문제다.
6자 회담 이후 미국의 선택은 여러 갈래다. 유엔 안보리에서의 대북 비난 또는 제재 결의안, 확산방지구상(PSI)을 통해 봉쇄와 인권공세 카드가 테이블 위에 올라 있다. 어떤 경우든 미국이 이라크 이외의 지역에서도 ‘일을 치를 수 있다’는 위력을 보유해야 한다.
그러나 미 당국자들의 장담과는 달리, 전문가들의 분석은 미국이 당분간 동북아에서 군사적 옵션을 행사할 능력이 없다는 데 모아진다. 도리어 핵문제를 계기로 세계 유일의 초강국인 미국이 보기보다는 훨씬 취약한 게 아니냐는 의문이 본격적으로 불거졌다. 학자들간에는 ‘제국의 실체’에 대한 논쟁이 재연됐고, ‘제국 이후’ 등의 제목을 단 저서들이 잇따라 출간되고 있다.
사실 미국의 약해진 모습은 간단한 수치비교로도 보인다. 지난달 30일 종전 30주년을 맞은 베트남 전쟁은 통킹만 사건이 발발한 1964년부터 사이공이 해방된 75년까지 11년간 계속됐다. 미군은 연인원 260만명, 최대 54만9,500명이 파병됐다. 그것도 유럽과 한반도에 대규모 병력을 그대로 유지한 상태였다. 반면 지금 미국은 이라크 전쟁을 시작한 뒤 2년 뒤 13만 8,000명의 병력을 유지하는 것도 힘겨워 하고 있다. 이제 미국의 해외파병능력은 아시아와 유럽을 포함해 50만명을 넘지 못한다는 게 일치된 견해다. 전쟁은커녕, 소규모 군사분쟁을 여러 개 치르기도 어렵다. 리처드 마이어스 미 합참의장이 비밀보고서에서 "이라크 등의 병력집중으로 다른 지역에서 분쟁이 발생할 경우 대응능력이 제한된다"고 보고한 것(뉴욕타임스 보도)은 솔직한 토로일 수 있다.
많이 지적되는 것은 미국의 전력이 너무 많이 뻗어나갔다는 것, 다시 말해 과잉팽창(Overstrech)했다는 점이다. 영국출신의 역사학자 나이올 퍼거슨 하버드대 교수는 ‘세계화의 종말’이라는 제목의 포린 어페어즈 기고문에서 이런 상황을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직전의 모습에 비교했다. 그에 따르면 미국의 약화는 총체적으로 진행돼 4년 후 베이비붐 세대가 은퇴하기 시작하면 재정적자가 급증하는 것은 물론 크게 활력이 떨어진다. 이런 모습은 대영제국의 말로와 비슷하다. 방대한 식민지를 유지하는 데 급급해 독일제국의 팽창과 유럽의 전쟁에 대처하지 못한 전례가 되풀이될 수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볼셰비키에 비유될 혁명테러조직인 알카에다가 있고, 3국협상 처럼 나토도 목적과 한계가 불분명한 동맹체제라는 게 두 시대의 공통점이다. 특히 대만을 둘러싼 미중 간의 대립은 90년 전 제국들이 벨기에과 세르비아 등 그다지 중요하지 않는 지역에 생사를 걸었던 사례를 연상케 한다고 말했다.
최근 한미간에 벌어졌던 ‘작전계획(OPLAN) 5029’을 둘러싼 논란도 동북아에서 미국 세력권이 줄어들고 있다는 것을 알리는 상징적인 사건이다. 작전권을 미국측에서 보유했던 과거와는 달리, 이제 북한 정권의 붕괴나 정변이 발생할 경우 평양을 먼저 접수하는 자에게 주도권이 있다는 점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유념할 것은 미국의 영역조정이 동북아에서 평화를 보장하기는커녕, 도리어 우발적 위험을 높일 것이라는 점이다. 급변사태에 대비한 시나리오를 여러 각도로 점검해야 할 때라고 본다.
유승우 국제부장 swyo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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