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호형은 뿌리가 깊은 소나무 같아요." 지난 해 5월말에 크랭크인 해, 촬영 기간만 9개월이었다. 그 중 2개월은 뉴질랜드 로케촬영. 6일 전주국제영화제 폐막작으로 처음 관객을 만나고 19일 개봉하는 영화 ‘남극일기’(감독 임필성·제작 싸이더스)는 사람들의 입방아 속에서 위태롭게 흔들렸다. 1999년 기획된 후 제작사가 2번, 프로듀서가 6번 바뀌었다. 영화가 나오긴 하는 거냐, 식의 심드렁한 반응이 늘 따라다녔다. 예고편이 공개되면서 걱정은 더 심해졌다. 끝없이 펼쳐진 눈과, 강렬한 극지의 햇빛 그리고 그곳을 걷는 탐험 대원 여섯 명이 전부인 영화. 이러다 엎어지는 거 아니냐는 악담에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였던 ‘남극일기’팀을 다독여 세운 이가 송강호(38)였다. 특히 뉴질랜드에서는 감독(임필성 감독은 33세) 포함 스태프 중 가장 연장자인 터라, 낮에는 촬영장 분위기를 이끌고 밤에는 술잔을 채우며 자신감을 북돋우는 것까지 송강호의 몫이었다. "내 입장이면 누구나 그렇게 해야 했다"고 송강호는 껄껄 웃는데, 유지태(29)는 그를 보며 굵은 소나무를 떠올렸다. "저런 게 주연의 풍모구나. 나중에 나도 저렇게 될 수 있을까." 원정대의 막내대원으로 출연하고 실제로 6명 주연배우 중 막내였던 유지태는 짙은 속눈썹 아래 까만 눈을 깜빡이며 송강호를 바라보곤 했다.
"눈(雪)이 보이느냐, 배우가 보이느냐." 텐트 속과 밖, 영화의 배경은 딱 두 가지다. 질리도록 펼쳐진 눈밭만 관객의 눈에 들어온다면 영화는 실패다. 유지태는 그런데 "배우들의 ‘눈’(目)만 보입니다"라고 받아 친다. 광기에 사로잡혀 무섭게 변해가는 인간의 눈. "단 한 장면도 허투루 넘어가지 않았다. 영화의 ‘밀도감’에 깜짝 놀랄 것"이라며 자신감이 대단하다. 영화제작에 조언을 아끼지 않았던 탐험가 박영석씨는 "남극에서 믿을 건 내 앞에 난 스키자국밖에 없다"고 말하곤 했다. 그런데 국내 최초로 시도하는 극지 스릴러 ‘남극일기’는 따라갈 스키자국이 없었다.
"지태는 ‘하고잽이’에요."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진중함으로 최민식이 ‘천연기념물’이라고 평했던 유지태는 하고 싶은 게 많다. 그리고 하고 싶은 건 꼭 하는 배우다. "사실 딱 세 가지에요. 영화, 연극, 그리고 좋은 아빠가 되는 것." 지난해 오달수와 함께 연극 ‘해일’에 출연했고 자신이 직접 대본을 쓴 연극도 준비하고 있다. 최근에는 단편영화 ‘장님은 무슨 꿈을 꿀까요’를 완성, 홍콩 단편영화제로부터 초청 받기도 했다. 원래 꿈이 연극 배우였다. 배우가 되고 싶어 연극영화과에 진학했는데 학창시절에는 큰 키 덕분에 늘 조명 담당을 벗어나지 못했다. 영화배우가 되고 나서도 아쉬움을 떨치지 못해 혜화동을 전전하며 연극을 봤고 오달수, 오광록, 박희순 등 연극배우 출신 선배들과 많은 이야기를 하고 연기를 배웠다. ‘도그빌’ ‘어둠 속의 댄서’ ‘라스베가스를 떠나며’처럼 저예산으로 제작했지만 큰 울림을 끌어내는 영화도 만들고 싶다. 하고 싶은 것에 대해 이야기 할 때 유지태는 목소리가 커지고 힘이 들어간다. 그래서 송강호가 붙인 별명이 ‘하고잽이’다. "하고 싶은 걸 할 때는 연애하는 것처럼 기분이 좋다"는 유지태는 ‘남극일기’ 개봉을 앞둔 지금도 연애하는 기분이다.
"저는 연습쟁이죠." ‘효자동 이발사’를 찍을 때 임찬상 감독은 "송강호씨는 언제 어디서 연습하는 건지를 모르겠다"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늦게까지 술을 마신 다음날도 촬영장에 나타나 흔들림 없이 연기하는 모습이 신기했던 것이다. "연기력을 타고나지 못한 탓에 지독하게 연습을 해야 하죠. 주인공에게 동화될 때까지, 마음이 움직일 때까지 하고 또 합니다." 촬영장에서 쉬워 보이는 건 이미 연습을 마친 상태이기 때문이다. "다음날 촬영분을 전날 연습하면 곤란하죠. 모든 것을 준비하고 연습한 다음에 촬영을 시작하는 게 저의 방식이니까요."
"여자말을 잘 들어야…." 영화 개봉을 앞두고 응한 수십 건의 인터뷰 중 단골 질문은 "남극에는 왜 가려는거죠?"였다. 그들이 가려 했던 남극의 ‘도달불능점’은, 깃대가 꽂힌 그 곳이 아니라 영혼이 구원 받을 수 있는 곳이다. 인터뷰를 거듭하면서 드디어 도달한 모범 답안이다. 인터뷰를 앞두고 유지태는 어머니가 했던 "너는 겸손이 독이 된다"는 말을 마음에 뒀다. "아내가, 모처럼의 인터뷰인데… 자신 없게 얘기하지 말고, ‘영화 좋다’고 자신 있게 말하라고 하더군요. 너무 겸손하면 오히려 재수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면서. 하하." 송강호는 크게 웃었다.
최지향기자 mist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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