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노천명은 5월의 풀내음은 꽃향기보다 더 곱다고 하였습니다. 아름답기 그지없는 이 5월은 18년 전 우리가 백년가약을 맺었던 달이기도 합니다. 연초록의 색감만큼이나 여리고 밝았던 5월의 신부를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데, 세월은 쏜살처럼 어느새 우리를 중년으로 내몰았습니다.
여보, 당신이라는 말을 하기가 쑥스러워서 부르기 시작했던 유선당(裕善堂)이라는 호칭이 이제는 많이 익숙해졌습니다. 이제는 아내의 호를 지어달라는 친구들의 부탁을 간간이 듣게 된 것도 하나의 기쁨입니다. 마음이 넉넉하고 착하게 살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은 호칭처럼 유선당께서는 평생을 그렇게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부부가 만나서 평생을 살아가다 보면 기쁘고 슬픈 일들이 교차하게 마련이고, 서로에게 맞추어 가는 과정에서 예외 없이 투닥거리게 되어 있지요. 그리고 시간이 흐르다 보면 그저 바라볼 수만 있어도 좋고, 발자취 소리만 들어도 가슴이 떨리던 초기의 뜨거운 열정은 서서히 묵은 정으로 바뀌어 가기도 합니다. 우리도 이제는 서로 곁에 있으면 충족감을 느끼고, 곁에 없으면 허전해지는 그런 정인(情人)의 관계가 되었나 봅니다.
고마울 때에는 ‘고맙다’고 인사하고, 잘못했을 때에는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것이 기본적인 예의인데도 아내에게는 대체로 인색하고, 겸연쩍어지면 오히려 큰소리를 내는 것이 평균적인 한국 남편들의 모습이지요. 나 역시 예외가 아니어서 마음속으로만 예의를 차리고 살아가는 옹졸한 남편임을 고백합니다.
지면을 통해서나마 전하고픈 감사의 말들이 있습니다. 어느 별에서 살다가 우리 곁으로 왔는지 모르지만, 주현이를 나의 품에 안겨 주던 그날의 감격을 기억합니다. 밤사이에 홀연히 우리 곁을 떠나가신 어머님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과 회한으로 힘들어 할 때, 조용하게 위로해 주었던 그 고마움을 잊지 못합니다. 바깥에서는 새로운 시대에 적합한 남녀 간의 성 역할 규범이나 양성평등을 근사하게 얘기하지만, 말과는 달리 집에서는 턱없이 부족한 나의 행동을 웃음으로 받아들여 주는 넉넉함을 가슴에 담고 있습니다.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아내로서, 직장인으로서, 또 어머니로서 그 모든 역할을 충실하게 해 가려는 유선당의 모습에서 삶의 기쁨을 느끼고 있습니다.
걱정의 말도 한마디 해야 할까 봅니다. 늘어나는 나잇살이 오히려 넉넉해 보여서 좋기도 하지만, 이제는 중년기의 건강을 걱정하게 됩니다. 조금은 밝고 여유로운 마음을 가지면서, 운동도 하고 문화적인 생활을 누릴 수 있었으면 합니다. 인생의 반려자(伴侶者)라는 말은 어깨동무를 하고 같이 걸어가는 친구라는 뜻이라고 하지요. 나이가 들어갈수록 우리의 삶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은 배우자입니다. 누군가 ‘가족들에게는 내가 살아 있다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라고 하더군요. 유선당과 나, 우리 두 사람은 서로를 위하여, 주현이를 위하여 지금보다 더 건강하게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다시 태어나더라도 당신을 만나고 싶다라는 표현처럼 배우자에 대한 최상의 찬사는 없을 것입니다. ‘다시 태어나더라도 유선당을 다시 만나고 싶습니다, 진정으로.’ 그리고 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유선당으로부터 이 말만은 꼭 듣고 싶습니다. ‘나 역시 그러합니다’라고 말입니다.
다가오는 15일, 우리들의 결혼기념일에는 장 폴 마르티니의 가곡 ‘사랑의 기쁨’을 들으면서 지난 시간들을 되돌아보고, 앞날에 대한 희망을 얘기하고 싶습니다. 나의 5월의 신부에게 사랑의 노래를 전합니다.
이유갑 (지효 아동 청소년 심리발달연구소장)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