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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에게 보내는 편지/ 엄마와 떨어져 사는 딸아,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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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에게 보내는 편지/ 엄마와 떨어져 사는 딸아, 고마워!

입력
2005.05.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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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 경현아! 엄마랑 떨어져 산 지도 벌써 2년이 넘었구나. 엄마 없이도 학교에 잘 다니고 있겠지? 요즘은 웃을 일도 없다는 할머니를 유일하게 즐겁게 해 주는 경현이가 늘 자랑스럽다. 보고 싶다.

새삼 우리 가족의 모습을 돌아보니 찡하구나. 엄마는 서울의 외가에서, 경현이는 아빠와 할머니, 할아버지랑 대구에서 살고 있으니, 결국 엄마와 아빠가 떨어져 각각 자신의 부모랑 사는 가족이니 말이다. 게다가 오빠는 대학 기숙사에 있으니 완전히 포스트 모던 가족이다.

경현아! 엄마가 원하는 일을 찾아 서울로 가야 한다고 했을 때를 기억하니? 엄마는 영원히 잊지 못할 거야. 할아버지가 가장 기뻐해 주셨잖아. 할머니는 분명 반대하실 거라 생각하고 전전긍긍했는데, 할머니조차 잘 됐다고 하시니 눈물이 핑 돌더라.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는 며느리구나 싶어서 행복했어.

치매노인 문제를 다룬 한 TV 프로그램이 아직도 생생하다. 치매로 앓던 시아버지를 돌보다가 그 분이 돌아가신 후, 시어머니마저 치매에 걸려 연달아 치매노인 두 분을 모신 한 아주머니가 나오셨지. 그 아주머니, 아니 그 분도 초로의 노인이셨는데, 이런 말씀을 하시더라. 시아버지를 간호할 때는 예전에 따스하게 해주셨던 추억으로 힘든 고비를 넘길 수 있었는데, 그런 기억이 별로 없는 시어머니를 돌볼 때는 정말 힘들었다고.

그래! 가족이라고 의무만으로는 어려운 고비를 넘길 수 없을 거야. 서로에 대한 사랑과 그런 사랑이 새겨진 추억이 고난을 이기는 힘이 되는 법이지. 엄마는 많은 사랑을 주신 할머니, 할아버지께 정말 감사드린다. 앞으로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엄마가 기억상실증에 걸린 사람처럼 이기적으로 투덜거릴 때 네가 살며시 다가와 속삭여주렴."추억들을 떠올리세요!"라고….

경현아! 엄마가 서울로 떠난 후 네가 가장 속상해 하며 하소연했던 일이 뭔지 아니? 할머니께서 오빠만 위하고 경현이는 딸이라고 차별한다며, 맛있는 딸기를 먹어보지도 못했다고 눈물을 뚝뚝 흘렸잖아. 세상에! 엄마는 남녀평등을 위해서 직장에서 일하는데, 엄마 딸이 집에서 과일 차별을 받는다니 엄청난 모순이지. 네가 너무 심각해서 할머니의 남아선호사상을 같이 성토했었지. 할머니의 남녀구별은 거의 신앙처럼 느껴진다. 그래도 많이 변하셨잖아. 지난 설날, 아빠와 작은 아빠의 설거지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셨으니 말이다. 아빠와 엄마는 평등부부처럼 살다가도 할머니, 할아버지 앞에서는 위장을 했는데 이제 거의 그럴 필요가 없게 됐어. 엄청난 진전이야. 그래도 할머니가 포기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으시고, 그 점이 너를 속상하게 했구나.

경현아! 지금은 어렵겠지만, 가족이라도 모든 것을 이해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단다. 음, 어떻게 말할까. 네가 싫어하는 청국장을 아빠는 너무 좋아하는 것처럼, 어떤 생각이나 행동도 그냥 청국장처럼 받아들이는 거야. 남자 친구가 생기면 다시 이야기해 줄게.

식물을 잘 기르는 경현이는 정말 초록색 손가락을 가졌나 봐. 네가 기른 파프리카가 노란색 열매를 두 개나 매달고 있는 게 너무 신기하다. 엄마는 식물을 제대로 길러 본 적이 거의 없어. 아마 그런 네 능력은 아빠 유전자의 힘인가 보다. 온통 연두색으로 풋풋한 과천의 나무들을 보며 경현이 생각이 더 절실하다. 보고 싶다. 이번 주말에는 예쁜 들꽃을 보러 나가 보자. 안녕 내 사랑!

양승주 (노동부 고용평등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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