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은 ‘세계 물리의 해’로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 발표 100주년이며 아인슈타인 서거 50주년이기도 하다. 4월 19일에는 아인슈타인 서거를 기념하기 위하여 말년에 살던 도시인 미국 프린스톤에서 빛이 출발하여 전세계를 한 바퀴 도는 기념행사가 ‘빛의 축제’(원명 Physics Enligtens World, 물리는 세계를 비춘다)라는 이름으로 신문 및 방송에 대대적으로 보도됐다. 나는 이 물리학이란 과학을 공부했고 지금도 하고 있는 셈이다. 다른 과학도 그렇겠지만 물리학이란 퍽 재미있는 과학이다. 물리학 가운데서도 내가 전공한다는 소립자 및 천체우주 물리학이란 더 더욱 그렇다.
소립자란 이 세상 물질의 최소 단위를 부르는 이름이다. 19세기까지는 원자였고 20세기에 들어오면서 원자는 원자핵과 전자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소립자란 원자핵과 전자가 되었다. 그 후 원자핵은 다시 양성자(수소원자의 핵을 말함)와, 양성자와 성질도 비슷하고 무게도 거의 같지만 전기를 띠고 있지 않아서 전기적으로 중성이기에 중성자라고 부르게 된 물질로 이뤄졌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양성자와 중성자와 전자로 이 세상의 모든 물질이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 알려졌다. 그래서 20세기 초반의 소립자란 양성자 중성자 그리고 전자를 말하게 되었다.
그러나 20세기 중반을 넘어서면서 수많은 새로운 소립자들이 원자핵을 파괴하면서 튕겨 나왔고 한 때 소립자의 종류가 300종이 넘은 적도 있었다.
그러나 20세기 후반기에 들어서면서 이들은 쿼크라는 여섯 종류의 더 작은 소립자의 복합체여서 물질의 최소 기본 단위인 소립자는 또 한 번 역사의 심판을 받게 되었다.
나는 이러한 소립자가 이 우주에서 어떤 역할을 하며 소립자들이 밤 하늘을 수놓은 저 별들의 일생을 어떻게 지배하는지를 공부하고 있다. 별에서 나오는 에너지가 소립자로 지구에서는 관측되기 때문에 소립자를 연구한 물리학자들이 별의 일생을 파악할 수 있다. 별도 사람처럼 태어나서 죽는다. 사람의 생명은 100년 정도이지만 별은 수 십억년의 평균수명을 가지고 있으며 많은 별들이 마지막 임종을 하는 순간에는 대폭발을 일으키며 태양보다 수 천만 배의 밝은 빛을 내어 뿜으면서 마지막 숨을 거둔다.
첨단 물리학을 공부하고 있으면 퍽 재미가 있다. 마치 결과를 쉽게 예측할 수 없는 선거처럼 첨단 물리학도 이와 비슷하다. 오늘 주장하는 물리이론이 시간이 흐르면 맞고 틀리는 것이 실험을 통하여 분명히 판가름이 난다. 그러나 판가름이 날 때까지는 온갖 소문과 허황한 주장이 난무하고 이러한 논쟁들이 학술잡지(물리에서는 대표적인 잡지로 ‘피지컬 리뷰 Physical Review’라는 미국 학술지를 꼽고 있다. 우리나라 언론에는 ‘네이처 Nature’가 마치 학술지의 최고 권위인 것처럼 보도되고 있는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 많은 독자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런 논리라면 뉴욕타임스에 보도되는 과학기사가 더 권위있는 것이 되겠다.)에 보도되고 선거가 투표결과로 판가름나듯 물리이론도 실험을 통하여 판가름이 난다. 최근 치러진 재·보궐선거의 온갖 풍문과 보도를 보면서 많은 독자들이 재미있게 즐기듯 물리학 학술지의 보도를 보는 것도 이와 비슷하다.
신문의 내용이 매일 다르듯이 학술지의 보도 역시 변화무쌍하고 그 주장 역시 정치판처럼 허무맹랑한 경우도 많다. 요즈음 내 일과는 인터넷을 통하여 세계 각지의 연구소, 미국 물리학회의 보도자료, 네이처등 각종 과학잡지기사 및 뉴욕타임스의 과학기사 등을 보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 변화 무쌍하고 재미있는 기사가 신문보도보다 더 다양하고 나로서는 더 재미있다. 신문을 한 두 달 보지 않는다 하더라도 기사를 이해하는 데 큰 지장은 없지만 과학은 계속 보고 있지 않으면 시대에 뒤처져서 무엇을 말하는지도 모르게 되고 재미도 없어진다. 내가 거의 반세기를 물리공부가 재미있어서 열심히 공부한 가장 큰 요인이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물리학이라는 과학을 대학에서 공부하겠다고 마음 먹은 것도 이와 비슷한 동기에서였다. 8·15 광복이 되면서 은행에서 일하시던 아버님을 따라 온 가족이 우리나라 최북단인 회령에서 경북 상주에 정착하게 되었다.
중학교를 다니다가 한국전쟁을 맞이했고 나는 상주농잠고등학교에 진학하게 되었다. 그 당시 우리나라는 퍽 가난했으며 놀이기구는 제기차기와 자치기 정도여서 하루하루가 퍽 무료한 나날이었다. 특히 방학이면 더더욱 그러했다.
이런 무료함을 면하는 방안의 하나로 나와 두 살 위인 형(김제필)은 수학문제를 누가 먼저 푸는가를 두고 시합을 하면서 무료한 나날을 견뎌 나갔다. 아마 그런 수학놀이가 밑거름이 되어 형은 서울대학교 수학 교수가 되었고 나는 같은 서울대학교의 물리학 교수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물리학을 전공하게 된 결정적인 동기는 의외의 곳에서 찾아왔다. 1950년대만 해도 책 구하기가 하늘의 별을 따는 것보다 어려운 시절이었다. 그런데 친척 아저씨 한 분이 일본에서 ‘극미의 세계(極微의 世界)’라는 제목의 수필집을 선물로 보내왔다. 동양인으로서는 처음 노벨상을 받은 유가와 히데키(湯川秀樹) 교수의 수필집이었다. 그 수필집속에는 유가와 교수의 이런 글이 실려 있었다.
"기차를 타고 멍하니 차창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여름 들판 저 쪽에는 뭉게구름이 떠 있고 차창 너머로 보이는 가로수들은 푸른 정도를 넘어 검푸르게 보였다. 선로 가에 서 있는 전신주와 집들이 빠른 속도로 지나가는 것을 무심코 바라보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자연을 이루고 있는 뭉게구름, 나뭇잎들 그리고 먼 산의 윤곽은 복잡한 곡선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그에 반하여 인간이 만든 인공적인 것들은 그렇지 않다. 지붕의 곧은 윤곽, 똑바로 올라간 전신주 그리고 밭과 논의 경계선인 곧은 길 이 모두가 간단한 직선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을 깨달았다. 인간의 사고능력에는 한계가 있어서 간단한 직선으로만 구상하는 반면 오묘한 대자연은 그 복잡한 곡선을 조화시켜 저렇게도 아름다운 작품을 만들어 내고 있으니 인간이란 오묘한 대자연의 섭리 앞에는 유치하고 하잘것없는 존재에 불과하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어느덧 기차는 교토(京都)역에 가까워졌는지 기적 소리를 힘차게 울리면서 시가지에 접어들고 있었다. 문득 다시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아무리 복잡한 곡선이라도 아주 잘게 나누어 보면 그 작은 부분은 직선이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곡선을 지극히 짧고 짧은 직선을 이어 만들 수 있는 것처럼 복잡한 자연도 인간의 기본적인 사고도 간단한 구성요소가 모여서 이루어진 것일 것이다. 자연의 직선에 해당하는 기본 입자인 소립자들이 뭉쳐서 산도 또한 뭉게구름도 이루고 있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치면서 감동적인 전율마저 느껴진다."
감수성이 강한 10대 후반기의 나에게 이런 유가와 교수의 사고는 금방 가슴에 와 닿았다. 서울대학교 물리학과에 응시한 것도 유가와 교수처럼 소립자 공부를 하겠다는 때묻지 않은 소박한 생각이 동기가 된 것 같다. 얼마 전에 어떤 기회가 있어서 옛날 서울대학교 문리대가 있던 동숭동에 들른 적이 있다. 지금은 문예진흥원이 된 대학본부 건물만 남아 있었고 같은 색깔의 문리대 본관 건물과 도서관 그리고 혜화동에 가까운 쪽으로 서 있던 붉은 벽돌 교실들은 모두 없어졌다. 대신 극장과 카페 그리고 켄터키 치킨 등 음식점이 들어서 있고 그렇게 향기롭던 마로니에는 모두 베어 버려서 흔적도 없었다. 유가와 박사가 생각하던 자연의 기본구조인 소립자도 옛날 서울대 캠퍼스처럼 그동안 엄청난 변화를 겪었다. 그 시대에는 기본적 입자라고 생각되었던 양성자와 중성자도 더 기본적인 소립자인 쿼크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 밝혀졌고 유가와 교수에게 노벨 물리학상을 안겨준 파이 중간자도 쿼크의 복합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소립자물리학을 막연히 동경하던 십대 소년이던 나도 이제는 그 분야의 권위자랍시고 그 분야의 연구에 열중하다가 그것마저 졸업하고 이제는 신문, 잡지 및 강연을 통하여 과학의 대중화에 힘쓰고 있다.
어릴 때 본 책 한 권의 영향은 마치 가정교육과 같다는 생각이 든다. 자라나면서 무의식 중에 배우고 듣는 아버지의 행동에서 그 아들의 성격이 형성되듯 나에게는 유가와 교수의 영향이 큰 것 같다.
● 김제완 교수는
김제완 서울대 명예교수는 1932년 경상북도 상주에서 태어났다. 서울대 물리학과를 나온 뒤 1968년 미국 컬럼비아대에서 소립자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우리나라에서는 실험을 통해 물리학을 연구한 1세대 물리학자로 꼽힌다. 일리노이 대학교 연구원, 연구조교수를 거쳐 72년부터 97년까지 서울대 교수를 지냈다. 현재 과학문화진흥회 회장으로 과학을 대중화하는 작업에 앞장서 7월에는 국립과학관에서 아인슈타인 특별전을 열 계획이다. 2005년 ‘세계 물리의 해’ 한국 조직위원장으로 최근의 ‘빛의 축제’를 주관했다. 펴낸 책으로는 ‘겨우 존재하는 것들’ ‘빛은 있어야 한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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