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 조영남 씨가 공적 생활에서 위기를 맞고 있다. 일본 우익 언론 산케이(産經)신문에 실린 ‘친일고백’ 인터뷰가 큰 역풍을 맞고 있다. 위기의 뿌리는 한참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올 1월 ‘맞아죽을 각오로 쓴 친일선언’이란 책을 썼고, 그것을 일본어판으로 출판하는 과정에 말썽이 일었다. 2002년 지일파 선언에서 친일파 선언을 거친 그는 마침내 책으로도 펴낸 것이다.
1999년 한 일본인이 한국에서 ‘맞아죽을 각오를 하고 쓴 한국, 한국인 비판’이란 책을 발행한 적도 있다. 두 사람은 크게 착각하고 있다. 어느 민족처럼, 한국인은 아무나 맞아죽게 하는 민족이 아니다. 이들은 현대판 견유학파(犬儒學派)일지도 모른다. 베스파시아누스라는 로마 황제가 있었다. 시골뜨기지만 유머감각이 풍부했던 그는 여러 사람을 스스럼없이 만났다. 어느날 황제정치를 타도하고 공화정을 세우려는 로마 철학자들이 그를 찾아와 공화정 복귀를 주장했다. 황제는 더 참지 못했다. "나한테 처형당하기 위해 무슨 소리든 지껄이기로 작정한 모양인데, 나는 깽깽 짖는다고 그 개를 죽이지는 않소." 이후 이 금욕주의적 철학자들은 견유학파로 불리기 시작했다.
한국에서 오래 살아온 그 일본인의 책은 한국인의 무질서와 몰염치, 일본 대중문화 모방 등을 꼬집고 있다. 불공정한 시각도 많지만 한국인에 대한 애정과 선의가 느껴지는 대목도 있다. 반대로, 지금 한국에서 친일을 밝히는 것도 맞아죽을 일은 아니다. 공정한 마음으로 일본의 좋은 점을 칭찬하는 것이 흠이 될 리는 없다. ‘나는 일본문화가 재미있다’를 쓴 문화평론가 김지룡 씨는 친일파로 비난 받지 않는다. 객관적으로 일본문화를 통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조 씨 책은 평하는 것 자체가 민망하다. 그 책은 최근의 산케이신문 인터뷰 내용보다 심각하다. 스스로 ‘유행가 가수’라고 겸허해 하고, 주변인은 ‘광대’라고 변명 자리를 깔아주고 있지만, 조 씨의 가치관과 글 수준이 왜곡되고 유치해서 참을 수 없는 부분이 너무 많다. 한 예로 '우리도 여봐란 듯이 남을 침공했다는 기록을 남겨보자. 점령국 사령관에 오르고 싶다. 나는 나라를 지키기만 한 위인들을 섬기는 일에 지쳤다>면서 가장 약한 나라를 침략하자고 제의한다. 정색을 하면 오히려 핀잔을 들을 지 모르나, 거기에는 일본의 과거침략을 합리화하는 독소가 숨겨져 있다.
'일본에 대한 터무니 없는 비하와 옹졸한 적대가 친미 획일주의를 불렀다. 지난 60년간 우리나라는 친미만 하고 살았다. 나도 그랬고 그것이 너무나 억울하다. 친미가 80%라면 친일은 20%정도는 돼야 하는데, 우리는 100% 친미만 했다>를 보면 그에게 한·미·일 간 뒤얽힌 기본적 현대사 지식이 있는지 의심스럽다.
우스운 예지만, 미국 포르노 영화에 비해 갈 때까지 간 일본 포르노를 극찬하는 부분도 있다. 1987년 세계여성단체가 일본의 악명 높은 포르노를 조사한 후 ‘세계에서 가장 잔혹하고 위험한 포르노’라고 결론 지은 일화를 들려주고 싶다. 그는 일본과 한국에서도 장기 베스트셀러가 되어 있는 책 ‘국화와 칼’이 미국 국내용이라고 폄하하면서도, 그처럼 한국을 말줄임하면 ‘무궁화와 부지깽이’ 정도일 것이라고 조롱하고 있다.
조 씨는 친일파 선언을 한 지 2년 만에 일본국제교류기금의 초청으로 ‘딱 1주일 동안 일본을 휘둘러보고’ 이 책을 썼다고 한다. 책에는 알 만한 정치인 문필가 등 4명이 굉장한 책 인양 추천사를 싣고 있으니 차라리 서글프다. 이 책 출간 한달 만에 한승조 지만원 조갑제 씨 등의 뒤틀린 친일발언이 줄을 이었다. 또한 때맞춰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과 왜곡된 역사 교과서 등이 한일 간 심각한 갈등을 일으키고 있다. 글과 책은 엄청난 결과로 번지기도 한다. 저자와 추천자의 책임은 한사코 막중하다.
parkrb@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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