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문 고전을 두루 대조해서 틀린 글자를 바로 잡는 교감(校勘) 작업이나, 읽기 쉽게 구문을 갈라 한문 문장에 부호를 붙이는 표점(標點) 작업은 문헌 연구에서 드문 일이 아니다. 하지만 역사서나 사상서가 대상이었을 뿐, 소설 등 문학장르는 배제돼 왔다.
한문학자인 박희병(49) 서울대 국문과 교수가 최근 낸 ‘한국한문소설 교합구해(校合句解)’(소명출판 발행)는 이런 의미에서 우리 한문소설 연구의 초석을 놓는 기념비적인 책으로 평가할만하다. 통일신라 말쯤부터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해 조선에 이르러 만개하는 한문소설의 ‘정본화(正本化)’ 작업이 1,000쪽을 넘는 이 책 한 권으로 늦게나마 비로소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흔히 쓰는 ‘교감’이나 ‘표점’이라는 말을 쓰지 않고 ‘교합’ ‘구해’라는 용어를 쓴 것은 한문 소설이 갖는 특수성 때문이다. 이를 테면 필사본으로 베껴서 소장하거나 돌려본 소설들은 정본이 어떤 것인지 짐작하기가 매우 어렵다. 따라서 기본적으로 남아 있는 모든 자료를 이본(異本)으로 간주하고 그 것을 비교 검토해서 하나의 표현이나 문장을 정해야 한다. 그 작업이 ‘교합’이다. ‘구해’는 표점 작업으로 그친 게 아니라 ‘교합’ 과정을 설명하거나 글자나 문장의 뜻을 해설하는 각주를 편당 많은 경우 500개(조선 중기 박두세의 ‘요로원야화기(要路院夜話記)’) 가까이 붙이고 작품마다 해제를 달았다는 뜻이다.
박 교수가 이렇게 교합구해한 소설은 모두 83편. 물론 지금 전하는 한문소설을 모두 정리한 건 아니다. 일단 장편소설은 빼놓고, 기이한 이야기를 엮어낸 전기(傳奇)소설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여겨지는 신라말 작자 미상의 ‘백운제후(白雲際厚)’부터 19세기 중반 경북 안동 출신의 춘파산인(春坡散人)이 썼다는 ‘오유란전(烏有蘭傳)’까지 단편이나 중편소설 가운데 비교적 문예적 사상적 가치가 높다고 판단되는 것들을 선정했다.
한국백상출판문화상(1999년) 저작상 수상작인 ‘한국의 생태사상’을 비롯해 ‘운화(運化)와 근대’ 등을 내며 한문학뿐 아니라 우리 전통사상에까지 폭넓은 관심을 보여온 박 교수는 이 작업에 무려 6년이란 시간을 쏟아 부었다. 교감이 예사 교감이 아닌데다, 필사본이라 판독되지 않는 글자가 수두룩했고, 문헌을 뒤져가며 주석까지 다는 작업이 행여 마감에 쫓겨 허술해질까 봐 그는 그 흔한 외부 연구비 지원 신청도 하지 않았다.
눈이 아파 계속 안약을 넣어가며 ‘한 땀 한 땀 자수 놓아가는 아낙의 심정’으로 글자 한 자씩 대조해가며 시비를 가린 이유는 ‘한국학이 안고 있는 정밀성의 부족이라는 약점을 극복해 보겠다’는 오기 때문이었다. "한국에서 정밀성의 문제는 비단 학문만의 문제는 아니다. 그것은 물건 만들기, 집 짓기, 다리 건설하기, 도로에 줄 긋기 등등 사회경제적 부문에서도 우리를 이류로 만드는 요인이다. 이 점에서 학문은 별건물(別件物)이 아니요, 사회와 나란히 가는 것이라 할 만하다. 한국학이 안고 있는 이 정밀성의 부족이라는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21세기의 초두인 지금부터 우리의 자세를 가다듬어 교감주석학을 정당하게 복원시킬 필요가 있다."(책 머리말) 덧붙여 그는 "교감주석학의 중요성이 정당하게 인식되지 않는 한 우리 고전에 굳건히 뿌리를 둔 제대로 된 심원한 사유나 이론은 나오기 어렵다"고 강조했다.
박 교수는 이번 책에 포함하지 못한 나머지 한문소설의 정본화 작업을 계속하면서 차후 후학들과 힘을 합해 이 책을 토대로 한문소설 국역 작업에도 도전할 생각이다. 국역본을 외국어로 옮기는 작업도 충분히 생각해볼 만하다. ‘한국한문소설 교합구해’는 정말 예사로운 책이 아닌 것이다.
김범수기자 bs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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