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전이 한국경제에 끼친 득과 실을 따져보는 것은 30년이란 세월이 흐른 뒤에도 여전히 비윤리적이고 냉혹한 짓이다. 5,000명에 달하는 전사자와 1만 1,000여명의 부상자, 그리고 6만 6,000여명의 고엽제 피해자가 흘린 피눈물과 그 대가인 달러의 무게를 비교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1970년 2월 미국 상원 외교위원회는 베트남전 참가국에 대한 미국의 지원 및 수당지급에 관한 청문회(일명 사이밍턴 청문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한국군은 ‘피의 보상을 노린 용병’으로 폄하됐을 만큼 한국의 베트남전 참전은 안보보다 경제논리에 따른 것이었다.
그만큼 당시 한국의 사정은 절박했다. 한국을 지탱하던 해외원조는 1964년 1억 2,400만 달러 수준이었고, 그나마 67년에는 완전히 중단될 처지였다. 하지만 1965년 한국이 베트남전에 참전한 직후인 66년부터 71년까지 5년 간 원조금액은 연평균 5억 500만 달러로 증가했다. 또 주베트남 한국군 사령부는 참전 군인들의 봉급을 직접 관리하며 72년까지 2억 달러 이상을 송금했고, 그중 40%는 반강제적으로 저축돼 경제개발에 활용됐다. 전사나 부상에 대한 보상금도 72년까지 6,500만 달러가 지급됐다. 이밖에도 베트남에 진출한 한국의 건설, 수송, 세탁, 유흥업소들이 벌어들인 외화가 2억 3,800만 달러였다. 이 기간 한국의 경제성장률은 연평균 12%에 이른다. 베트남에서 흘린 피와 땀이 ‘한강의 기적’의 중요한 밑천이 된 것이다.
하지만 베트남 진출 기업과 정부의 밀월관계 속에 이른바 ‘월남 재벌’들이 탄생하며 이후 재벌중심 경제의 길을 열었으며, 전쟁특수가 일본과의 국교정상화(1965년)와 겹치면서 대일 무역의존도가 심화하는 계기가 됐다. 베트남전 초기 한국의 주요 수출품인 철강제품, 화학비료, 기계류의 주요 원자재 부품 공급자가 일본이었던 것이다. 더욱이 전투병력 참전으로 한국이 거둔 경제적 이익은 단지 병참기지 역할만 했던 일본과 대만보다도 적은 것이었다. 일본 노무라 연구소의 추산에 따르면 일본은 1965~67년 3년 간 22억 달러의 외화를 벌었다.
1975년 베트남전 종전 이후 17년 만인 1992년 한국과 통일베트남은 과거의 악연을 뒤로 한 채 수교를 맺는다. 이후 양국의 경제협력은 눈부신 속도로 빠르게 진전했다. 현재 한국은 베트남의 수입대상 2위 국가이며, 지난해 한국의 대 베트남 무역흑자 규모는 25억 달러를 넘었다. 또 올해 1월 기준으로 한국의 대 베트남 직접투자는 689건 28억 4,447만 달러로 4위 투자국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정영오기자 young5@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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