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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원의 길위의 이야기] 지문이 닳도록 일한 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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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원의 길위의 이야기] 지문이 닳도록 일한 할머니

입력
2005.04.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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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어떤 분으로부터 지문에 대한 얘기를 들었다. 오래도록 공무원 생활을 하신 분인데, 20여년 전에 염색공장에서 일하는 청년이 주민등록증을 새로 만들러 왔는데 일을 너무 해 지문이 없더라고 했다. 박노해 시인의 오래된 시집 ‘노동의 새벽’에도 지문이 닳은 노동자 얘기가 나온다.

그 얘기를 들으며 나는 아주 오래 전에 돌아가신 작은할머니를 떠올렸다. 여름에 맨손으로 매는 논김도 지문을 닳게 하지만, 가을에 추수를 해 곡간에 갈무리할 때까지의 일이 남자보다 여자들 손에 지문이 남아나지 않게 한다. 벼를 베고, 그 벼를 묶어서 말리고, 뒤집고, 탈곡을 하고, 바람에 쭉정이를 날리고, 다시 여러 날 멍석에 펼쳐 말리고, 그것을 가마니에 넣어 추곡수매를 하거나 방앗간에 가 쌀을 찧을 때까지의 일이 농촌 여자들 손에 지문을 없애버리는 것이다.

내가 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 어느 해인가 지금까지 발급된 모든 주민등록증을 새로운 모양으로 바꿀 때 작은 할머니는 지문이 찍어지지 않아 열흘 쯤 후 동네의 다른 아주머니 한 분과 한 번 더 면소에 나가 지문을 찍고 오셨다. 말 그대로 손금이 닳도록 일해 당숙들의 공부를 가르친 할머니셨다.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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