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6세대인 기자는 대학시절 교문을 나서면 만나는 ‘낯선 한국인’ 때문에 당혹스러웠던 적이 있었다. 최루가스가 자욱한 교내엔 상주 경찰과 시위 학생들의 살벌한 공방전이 벌어지고 있는데 학교 앞 버스 정류장부터는 전혀 다른 세상이었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 있냐는 듯 무표정하게 발길을 재촉하는 시민과 주변 교통체증에 짜증을 내며 "지금이 어느 때인데 데모를 해"라고 혀를 차는 버스 승객들. 기자는 그때 "저들은 도대체 어느 나라 사람들일까" 라는 생각을 했었다. 시대착오적 군사독재와 경제구조 왜곡, 빈부격차 등 사회 모순에 눈 감고 있는 저 사람들이 사는 목적은 무얼까. 한편으론 분노가 치솟았지만, 다른 한편으론 끝을 모를 거대한 침묵의 벽과 홀로 마주선 것과 같은 무력감에 휩싸이기도 했다.
이런 혼란이 정리되는 데는 시간이 꽤 걸렸다. 1991년 초 민자당에 출입하면서 불과 몇 년 전까지 악의 화신으로 여겼던 군사 정권의 실세들을 처음 마주했을 때 느꼈던 묘한 기분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하지만 세상 경험은 마음의 울타리를 조금씩 넓혀주었다. 특히 학생운동과 민주화도 경제 성장과 빈곤 탈출이라는 물적 토대 위에서 가능했던 것이고, 그래서 산업화 세력의 기여를 일정 부분 인정할 수 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면서 70, 80년대를 선과 악으로만 재단하는 이분법을 던져 버릴 수 있었다.
그런데 기자는 최근 노무현 대통령에 의해, 대학시절 마음 속으로 손가락질 했던 ‘낯선 한국인’이 됐다.
기자는 노 대통령의 동북아 균형자론에 대해 긍정보다는 우려를 하는 쪽이다. 정부는 균형자론이 굳건한 한미 동맹을 전제로 한 것이라고 설명하지만, 현실적으로 균형자론과 한미동맹은 모순 관계일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다.
따라서 노 대통령이 16일 터키 이스탄불 교민과의 간담회에서 "한국 국민 중 미국 사람보다 더 친미적 사고를 갖고 말하는 사람이 제일 힘들다"며 ‘균형자론이 한미동맹을 훼손할 수 있다’는 시각을 비판한 것은 의견차이인 만큼 넘어갈 수 있다. 요즘 세상에 친미냐, 반미냐의 구분은 유치하기 짝이 없는 것이지만, 굳이 선택을 강요한다면 친미라고 말할 수도 있다. 노 대통령이 상황을 단순화해 편을 가르고 정치적 이득을 취한 게 어제 오늘의 일도 아니다.
그러나 "한국 사람이면 한국 사람 답게 생각하고 판단해야 한다"는 대목은 동의할 수 없다. 기자의 사고방식은 한국 사람 답지 않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외교정책에 대한 생각이 다르다고 한국 사람 답지 않다니, 이런 독선이 어디 있나.
한국 사람다운 생각은 또 무언가. 노 대통령은 균형자론의 얼개만 공론의 바다에 던져 놓았을 뿐 정확한 실체를 알려준 적이 없다. ‘우리가 균형자를 자임할 경제적, 군사적 실력을 갖추고 있는지’, ‘상황이 벌어진 것도 아닌데 왜 균형자 노릇을 하겠다고 큰 소리부터 치는지’ 수많은 물음이 이어지고 있지만 대통령과 정부 어디에서도 명쾌한 대답이 없다. 외교부에서조차 잡음이 심상치 않은 것은 균형자론이 그만큼 설익었다는 증거다. 그러면서도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을 이제 친미도 모자라 한국 사람 답지 않다고 몰아붙인다.
노 대통령은 이런 언사 때문에 얼마나 많은 국민이 모욕감을 느꼈을지 생각해봤는지 모르겠다. 도대체 얼마를 더 기다려야 대통령이 ‘낯선 한국인’도 감싸 안는 모습을 볼 수 있을까.
유성식 정치부 차장 ssyoo@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