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사인펜으로 그린 격자무늬, 검정펜으로 그어나간 반복적인 선들의 집합, 중간중간에는 화이트로 수정한 자국까지 고스란히 남아있다. ‘저것도 예술이야?’ 관객들은 그림에 얼굴을 바짝 들이대기도 해보지만 여전히 잘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이다. 프랑스 화가 루이스 브르주아(94·사진)의 그림을 보는 관객들의 대체적인 반응이다. 고정된 양식이나 재료, 특정한 규칙을 따르지 않는 것으로 유명한 그의 전시회가 서울 소격동 국제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다.
"이렇게 지워나가는 작업 자체도 작품입니다. 그에게 작품은 일기장과 같은 의미거든요. 그때 그때의 심리상태를 그대로 표현했으니까요. 브르주아는 어릴 때 받은 상처를 이런 작업을 통해 해소해왔습니다. 일종의 치유 과정이라고 할 수 있지요."큐레이터들의 설명이다.
브르주아는 1911년 파리에서 태어나 여덟 살 때부터 드로잉을 하며 부모를 도와 가업인 융단사업에 참여했다. 그즈음 아버지가 가정교사와 불륜에 빠졌고 어린 브르주아는 배신감에 큰 충격을 받았다. 아버지에 대한 증오는 그의 작품에 그대로 드러났다.
"예술의 목적은 두려움을 정복하기 위한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에게 작업은 그랬다. 과거의 기억과 무의식 속의 고통을 물리적인 형태로 만들어 자신의 의지대로 조절함으로써 해소하는 심리적 치료와 같은 것이었다. 작업은 불면증에 시달리는 그를 위로하고 치유해줬다.
그의 작품은 추상에 가까운 기둥 형태의 인물상부터 신체의 부분이나 성적인 이미지를 표현한 조각, 대형 거미 형상의 브론즈 작업, 손바느질한 천 조각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이번 전시회에서는 지난 2년간 작업한 드로잉과 헝겊에 찍은 동판화, 바느질 작업, 조각 등 100여 점을 볼 수 있다. 어린 아이가 그린 듯한 평행선의 끊임없는 되풀이, 간결한 선으로 표현한 판화 ‘사팔뜨기 여인’ 시리즈, 밀실 안에서 부둥켜 안고 있는 남녀를 표현한 조각 등에서 그의 외롭고 상처 받은 영혼을 느낄 수 있다. 이제는 벗어나려고 애쓰는, 어떻게든 마음을 추스리려는 의지도 함께 느껴진다.
오래 동안 빛을 보지 못하다가 1970년대 말부터 새롭게 조명받기 시작한 브르주아는 82년 뉴욕 현대미술관(MoMA)에서 열린 여성 회고전을 계기로 국제적 명성을 얻게 되었고, 1999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하면서 세계적인 예술가로서 입지를 굳혔다. 전시는 5월 13일까지. (02)735-8449
조윤정기자 yjch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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