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三國遺事)는, 이름처럼 사(史)가 아니라 사(事)의 기록이다. 왕명을 받든 사관(史官)이 당대 사관(史觀)에 입각해 저술한, 각박한 뼈의 기록이 아니라 한 선승이 자의식의 충동과 흥으로 쓴 품 넓은 문학이다. 거기에는 정사가 추려 버린 역사의 탱탱하고 달보드레한 속살이 있고, 분 냄새 땀 냄새가 배어 있다. 아니 솔직히, 윤후명씨의 장편소설 ‘삼국유사 읽는 호텔’을 읽고 보니 그런 듯하다.
소설은 화자인 ‘나’의 3박4일 평양 여행을 다룬다. 그의 여행은 낮 동안 평양 시내와 묘향산 등지의 명승지를 둘러보는 행적과 밤 시간 양각도 호텔 방에 ‘갇혀’ 삼국유사를 새롭게 읽는 감흥으로 양분된다.
통제된 여행자의 밤은 술과 책 외에 더불어 할 게 없었던가 보다. "나는 왜 내가 책에 몰두했는지 알 것 같았다. 막힌 통로 속에서의 몸짓, 그것이 아닐까."(p.68) ‘나’에게 ‘막힌 통로’란 외출 불허라는 신체적 부자유 외에 여수(旅愁)의 적막과 함께 불쑥 치미는 옛사랑 M에 대한 두절된 관계로서의 기억, 막막한 현실로 주저 앉은 주체사회주의에 대한 답답함이다.
하지만 소설의 뼈와 몸은 단연 삼국유사다. ‘나’는 단군신화와 가야·삼국시대, 고려 건국에 이르는 ‘유사’의 주요 대목들을 찬찬히 읽는다. 그 독서의 궤적은 시와 노래 신화 전설 설화 향가의 해설로 이어지고, 문득 ‘막힌 통로’들의 단상으로 나아간다. 어느 봄날 M과 함께 했던 경주 여행에서 본 월성의 잔상과 삼국유사가 기록한 만파식적의 기적 등이 어우러진 한 대목이다. "네가 말한 대로 월성의 월이 달이고, 그 달이 닭이라면 거기 창고에 있는 대나무 피리를 가져오는 것도 닭 모습을 한 피닉스일 거야. 그걸 가지고 서울과 평양의 하늘에 높이 날아오를 거야"(131쪽)
여정의 첫 머리에 ‘나’는 M과의 기억을 떠올리며 "나는 역사의 향기를 우리의 만남 안에 불어넣으려는 욕심을 가졌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작가는 후기에 "‘소설’이라는 틀을 가져왔지만, 소설의 성과에는 아랑곳없다. 나는 다만 그 속에 내 진실을 담으려고 밤을 새웠을 뿐"이라고 적고 있다. 그의 ‘진실’은 지금 이 땅 우리의 ‘막힌 통로’를 뚫어줄 무한한 힘의 보고(寶庫), "삼국유사의 깊넓은" 정신 세계일 것이다.
최윤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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