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이면 충남 청양 칠갑산은 분홍 물감을 쏟아부은 듯 진달래가 지천이다.
봄볕이 산허리를 쓱 쓰다듬고 돌아나오면 진달래는 앞 다퉈 붉은 꽃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한다. 예전에는 흰 진달래도 흐드러지게 피어 붉은 색과 어우러지는 장관을 연출했다. 그러나 사람들이 마구잡이로 캐 가는 바람에 흰 진달래는 자취를 감춘 지 오래다. 이미 10년 전에 산림청이 멸종 위기 후보종으로 분류했으니….
그런데 1970년대부터 흰 진달래 증식에 매달려 온 안종관(65·청양군 송방리)씨가 올해 칠갑산 기슭에서 1,000여 그루의 흰 진달래를 피워 냈다. 15일 만난 안씨는 "진달래는 분홍 꽃도 정겹지만 그 사이로 핀 흰 꽃들은 눈이 부실 정도로 곱고 화사하지요"라고 말했다.
그는 30여 년 전 청양농촌지도소에 근무하던 시절 친구집에 갔다가 우연히 본 하얀 진달래 빛깔에 반했다. 두 그루를 얻어다 키웠는데 얼마 못 가 죽어 버렸고 산에도 올라가 보았으나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다. "옛날엔 칠갑산에 흰 진달래 군락이 넘쳐났는데 사람들이 보는 대로 캐 가 버리니 남아나질 않는 거예요. 그 때야 요즘 같은 자연보호법도 없었고…. 그래서 내가 한번 복원해 보자고 결심했지요."
안씨는 꺾꽃이와 포기나누기 등 온갖 방법을 시도하고 나서야 흰 진달래는 씨앗으로만 번식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하지만 씨앗이 눈에 보일 듯 말 듯할 정도로 작아서 발아 성공률이 턱없이 낮았다. 꽃이 진 다음에 열린 씨방을 꼬투리째 채취해 이듬해 4월 파종하는 방법을 써서 겨우 싹을 틔우는 데 성공했다. 추운 날엔 묘판을 방안에 옮겨놓고 날이 풀리면 다시 밖에다 내놓는 수고를 수없이 되풀이했다. 자식처럼 길러낸 어린 묘목들은 4년 만에 드디어 첫 꽃망울을 맺었다. 해마다 이렇게 키운 묘목이 지금은 뒷산 안씨 소유 임야 3,000여 평을 가득 채웠다. 그 중 절반 가량인 1,000여 그루가 지금 수천 송이 흰 꽃망울을 터뜨린 것이다.
80년대 중반에는 돌림병인 잘록병 때문에 묘목 10만 그루를 잃었고, 2001년엔 폭설로 비닐하우스가 무너지는 바람에 5만여 그루를 다 버렸다. 아내(서영자·65)한테 "진달래가 자식보다 소중하냐?"는 핀잔을 듣기 일쑤였다.
이렇게 터득한 종자번식법으로 지난해에 특허를 출원하기도 했다. 혹시 사업화 계획은 없느냐고 묻자 손사래부터 쳤다. "이제 칠갑산도립공원에 진달래 동산을 만들어 관광명소로 만들고 싶어요."
예로부터 진달래는 꽃 색깔에 따라 이름이 달랐다. 하얀 진달래는 흰달래, 연한 분홍이면 연달래, 알맞게 붉으면 진달래, 진한 분홍이면 난초 꽃 같다 하여 난달래라고 했다. 조선 초기 재상 강희안은 화품(花品·꽃의 등급)을 매겼는데 흰 진달래는 운치가 있다 하여 5품, 붉은 진달래는 하나 낮은 6품으로 쳤다.
국립산림과학원 채명섭 임업연구관은 "야생 진달래는 번식이 워낙 까다로워 산림청도 선뜻 나서질 못했는데 안 선생 덕분에 귀한 꽃 구경을 마음껏 하게 됐다"고 말했다. "사람들이 불쑥 찾아와 애지중지 키워온 묘목을 달라고 떼쓸 때는 참 난감합니다. 하지만 참 멋을 알아주는 것 같아 마음만은 즐겁지요. 찾는 사람이 늘어나 전국에 보급할 계획도 구상 중입니다. 흰 진달래가 봄마다 전국 산천에서 활짝 피어나는 모습을 보는 게 제 꿈입니다".
김명수기자 lecer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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