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1879~1910) 의사가 중국 뤼순(旅順) 감옥에서 쓴 붓글씨는 현재 소재나 진위가 확인된 유묵만 50점이 넘는다. 제자리를 찾아 95년만에 한국에 오는 ‘獨立’(독립)의 가치는 그 중에서도 특별하다. 국권 회복을 위해 교육운동에 힘쓰다, 연해주와 만주에서 의병투쟁을 이끌고, 1909년 동지 11명과 목숨을 건 구국투쟁을 맹세하며 단지(斷指)동맹을 주도한 뒤 마침내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쓰러뜨리고 순국하기까지의 애국 충정이 이 붓글씨 하나에 녹아 있기 때문이다.
안 의사의 유묵은 애국심이나 지사 정신을 강조한 것도 여럿 있지만 삶의 자세나 인생관을 담은 글이 더 많다. 널리 알려진 ‘一日不讀書 口中生荊棘’(일일부독서 구중생형극·하루라도 글을 읽지 않으면 입안에서 가시가 돋는다)이나 국내에서 보물로 일괄 지정된 안 의사 유묵 중 제1호인 ‘百忍堂中有泰和’(백인당중유태화·백번 참는 집안에는 태평과 화목이 있다)가 대표적이다.
안 의사의 기개와 인품을 흠모한 뤼순 지역 일본군 고위층과 뤼순 감옥 간수들에게 그들의 처지에 맞춰 써준 글이 많기 때문이다. 뤼순 법원의 당시 일본인 검찰관이나 재판정을 오갈 때 안 의사를 호위한 헌병에게 각각 써준 ‘國家安危勞心焦思’(국가안위노심초사·국가의 안위를 걱정해서 애태운다) ‘爲國獻身軍人本分’(위국헌신군인본분·나라 위해 몸 바치는 것이 군인의 본분이다)이 그런 유묵들이다.
안 의사에게서 옥판선지(玉版宣紙)라는 고급 종이에 쓴 ‘獨立’ 유묵을 받은 시다라 마사오(設樂正雄)씨도 간수였다. 글을 받은 경위는 분명치 않지만 마사오씨가 안 의사와 동갑(당시 31세)에 생월(9월)까지 같아 친했을 것이라는 게 조카 손자인 현 소장자 마사노부(正純·77)씨의 설명이다. 시다라씨의 작은 할아버지는 35년 휴가를 얻어 귀향할 때 이 유묵을 몰래 가져가 히로시마(廣島) 인근의 집안 절인 간센지(願船寺)에 보관했다. 패망 뒤 귀국한 그는 "아까운 사람을 일본이 죽였다"고 늘 말했다고 한다.
유묵의 존재가 처음 알려진 것은 2000년 7월. 안 의사 유묵 추적과정에서 이 붓글씨의 소장처를 확인한 다큐멘터리 제작자 김광만 더 채널 대표가 당시 시다라씨를 국내로 초청해 처음으로 존재 사실을 밝혔다.
그 뒤 일본 아사히(朝日)신문이 필적감정전문가인 우오즈미 가즈야키(魚住和晃) 고베(神戶)대 교수의 감정을 거쳐 보도했고, NHK 등이 이어 같은 내용을 전했다.
우오즈미 교수는 이듬해 분게이순주(文藝春秋)에서 낸 ‘현대필적학서론’이라는 책에 ‘안중근의 유묵’이라는 별도의 장을 할애해 감정과정을 설명한 뒤 "첫 획을 크게 쓰고 ‘立’자의 2획이 글자 중간에 위치할 정도로 윗부분을 강조해 쓰는 등 의심의 여지가 없는 진품"이라고 밝혔다.
최근 재확인을 요청 받은 그는 "이 글씨의 장인(掌印)은 손마디가 굵고 손가락이 끝까지 나타나 다른 유묵보다 더 신념과 결의를 가지고 힘있게 눌러 찍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설명했다.
시다라씨는 비록 ‘대여’라는 표현을 쓰기는 했지만 ‘안중근의 유묵을 그의 심정을 받들어 한일친선우호의 표시로 귀국에 돌려준다’는 확인서에 날인을 했고, "안 의사가 작은 할아버지에게 호의로 준 유묵이라면 나도 한국민에게 똑 같은 호의를 보일 필요가 있다"는 뜻을 밝혔다고 김 대표는 전했다.
현재 동아방송대 방송극작과에도 출강하는 김 대표는 일본에 흩어져 있는 안 의사 유묵 20여 점과 재판 삽화 등 관련 자료를 모아 국내 전시를 추진 중이다.
김범수기자 bskim@hk.co.kr
■ 中동포학자들 안중근 책 냈다/ 일대기·이토 저격 등 자료모아
안중근 의사 순국 95주년을 맞아 중국 헤이룽장(黑龍江)성 동포 학자들이 안 의사의 일대기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저격 관련 자료를 모은 자료집 ‘안중근과 하얼빈’(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 발행·사진)을 냈다.
김우종(78) 전 헤이룽장성 당사(黨史)연구소장이 주도해 자료 수집에만 3년 걸린 이 책은 중국 안팎 언론의 안 의사 의거 보도 내용과 저우언라이(周恩來) 등 중국 중요 인물들의 평가를 소개한 뒤 안 의사의 성장, 구국 운동 과정을 여러 사진 자료와 문서로 상세히 설명했다. 김 전 소장은 "안 의사가 갈망하던 동양평화는 아직 매우 불안한 형편"이라며 "이 자료집이 역사를 바로 이해하고 아시아 각 국민들이 친선을 증진하는데 도움 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김범수기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