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이 비리 정치인들에 대해 납득하기 어려운 이유로 형량을 터무니없이 줄여 주거나, 봐주기를 해 왔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사법제도개혁추진위원회 기획연구팀장으로 활동 중인 하태훈(사진) 고려대 법대 교수는 대한변호사협회가 발간하는 ‘인권과 정의’ 3월호에 기고한 ‘불법 대선자금 관련 정치인에 대한 양형(量刑)의 문제점’이라는 글에서 정치인 집행유예 및 감형 사유의 부당성을 일일이 거론하며 강도 높게 비판했다.
우선 불법 대선자금에 연루돼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정치인 17명 가운데 실형을 선고받은 정치인은 4명뿐이고 나머지 13명(76.5%)은 집행유예(10명)와 벌금형(3명)에 그쳤다. 또 항소심 판결이 나온 정치인 12명 중에서 1심보다 형량이 줄지 않은 경우는 2명에 불과했다. 기업인 역시 불법 대선자금 사건으로 22명이 유죄판결을 받았으나 전부 선고유예나 벌금, 집행유예를 받았을 뿐 실형은 없었다.
2002년 대선 당시 기업체들로부터 562억원의 불법자금을 받은 혐의로 1심에서 징역 4년과 추징금 15억원이 선고된 서정우 변호사에 대해 항소심 재판부는 "562억원 중 15억원을 잘못 인정했다"는 이유로 무려 2년을 감형해 주고 추징금도 14억원이나 깎아 줬다.
정대철 전 의원은 항소심에서 죄목이 늘어 추징금이 증가했으나 재판부는 감형사유를 언급하지 않은 채 오히려 형량을 1년 줄여 줬다. 개인의 이익을 위한 자금 수수가 아니라거나(최돈웅 전 의원·2년 감형), 선거대책본부장이라는 직책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가담했다(김영일 전 의원·1년6월 감형)는 등의 이유로 항소심에서 감형되기도 했다.
박명환 전 의원의 경우 1심에서는 "3선 의원이 자신의 엄정한 책임을 망각했다"며 ‘3선 의원’을 가중처벌 사유로 판단했으나, 항소심 재판부는 "3선 의원으로서 국가와 국민을 위해 봉사한 점을 감안한다"며 오히려 감형 사유로 삼았다. "친구가 주는 돈이라서"(신상우 전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 신경식 전 의원), "국가에 헌신했기 때문에"(박상규·김영일 전 의원), "정치적 신념에 따른 것일 뿐"(서정우 변호사), "전액 추징되니까"(박상규 전 의원), "6개월 동안 구속됐고"(서청원 전 의원), "정치자금을 직접 요구하지 않았기 때문"(김종필 전 자민련 총재) 등 이유도 다양했다.
하 교수는 "판결 첫머리에 엄히 혼내는 척하다가 감형 사유를 밝히지 않은 채 용두사미로 끝낸 사건도 한둘이 아니다"며 "법원이 ‘선처사유 제조기’ ‘고무줄 양형’이라는 비아냥거림을 듣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고 꼬집었다.
그는 "정치인에 대해서는 수사가 진행되더라도 기소단계에서 머뭇거려 기소재량권 남용이라는 비판을 받고, 설사 공소가 제기되더라도 유죄판결을 받아내기가 쉽지 않으며 유죄라 하더라도 실형은 더더욱 어렵고, 실형이 선고돼 집행되더라도 사면을 받고 풀려나는 게 우리의 사법현실"이라고 일침을 놓았다.
하 교수는 "불법 정치자금 사건에서 집행유예의 허용은 국민의 법의식과 사법정의에 대한 신뢰 악화를 초래한다"며 "사법부는 제도와 관행을 탓할 게 아니라 과감하게 실형을 선고해 법이 살아있음을 보여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지성기자 jskim@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